신라(新羅)의 쇠망(衰亡)
신라(新羅)의 통일(統一)한 후(後)에는 통일(統一)하기 이전(以前)의 웅대(雄大)한 기백(氣魄)과 선미(善美)한 풍습(風習)이 점점(漸漸) 사라지기 시작(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쇠망(衰亡)할 전조(前兆)이다. 그 이유(理由)는
一.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왕위(王位)를 서로 현자(賢者)에게 사양(辭讓)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왕위(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궁중(宮中)에 살벌(殺伐)과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정치(政治) 지도층(指導層)이 청백(淸白)하고 국사(國史)에 충성(忠誠)하여 민중(民衆)의 모범(模範)이 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귀족층(貴族層)이 부패(腐敗)하여 일야(밤낮) 왕유연(日夜 王遊宴)을 일삼고 경중(京中)에는 가무(歌舞)의 음악(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四.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화랑(花郞)의 무리와 같은 소년(少年) 애국자(愛國者)가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爲)하여 일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국민(國民)이 모두 위정(爲政) 계급(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화랑정신(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卽位)한 후(後)로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을 잡고 정치(政治)를 어지럽혀서 백성(百姓)의 원성(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흉년(凶年)이 겹 들어서 각지(各地)에 도적(盜賊)이 봉기(蜂起)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궁예(弓裔)로 하여금 북방(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을 위(爲)하여 원수(怨讐)를 갚는다하고 후백제(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서남방(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후(後)에 궁예(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송악(松嶽)군(郡)에 도읍(都邑)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옛 나라를 회복(恢復)한다하고 국호(國號)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들이 그 조국(祖國)이 망(亡)한지 이미 수백년(數百年)에 아직도 조국(祖國) 광복(光復)의 뜻이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을 이용(利用)하여 신라(新羅)에 반항(反抗)케 하고 그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려 함이다. 궁예(弓裔)는 다시 철원(鐵原)으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마진(摩震)이라 하다가 또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은 도읍(都邑)을 무주(武州)로 옮기고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와 무역(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동(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반도(半島) 안에는 삼국(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태봉(泰封) 왕(王) 궁예(弓裔)는 송악(松嶽)사람 왕건(王建)을 시켜서 해로(海路)로 나주(羅州)를 쳐서 빼앗고 후백제(後百濟)와 중국(中國)과의 교섭(交涉)하는 교통(交通)을 끊고 고유(固有)한 항해(航海) 세력(勢力)을 발휘(發揮)하여 서해(西海)의 해적(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왕건(王建)의 명성(名聲)이 일국(一國)에 떨쳤으니 태봉(泰封)왕(王)의 성질(性質)이 포악(暴惡)함으로 부하(部下) 제장(諸將)이 왕(王)을 쫓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고려시조(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