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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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惠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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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定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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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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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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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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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戊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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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甲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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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丙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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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庚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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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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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壬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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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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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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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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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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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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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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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穆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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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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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德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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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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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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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順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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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戊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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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庚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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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壬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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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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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丁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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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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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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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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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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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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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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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宣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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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獻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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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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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睿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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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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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毅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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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甲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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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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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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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丙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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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癸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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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丁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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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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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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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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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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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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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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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明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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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神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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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熙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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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康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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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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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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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辛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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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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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乙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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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壬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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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甲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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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庚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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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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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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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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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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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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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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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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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忠宣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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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忠肅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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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忠惠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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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왕(忠穆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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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왕(忠定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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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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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乙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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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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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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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乙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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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乙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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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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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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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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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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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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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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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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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禑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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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昌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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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恭讓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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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壬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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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乙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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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己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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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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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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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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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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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태조(太祖)는 이듬해 송악(松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신라(新羅)와 친선(親善)을 도모(圖謀)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제압(制壓)하려는 정책(政策)을 쓰니 신라(新羅)도 후백제(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고려(高麗)와 친(親)하려 하였다.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은 이를 보고 비밀(秘密)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신라(新羅)에 쳐들어갔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은 마침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후백제(後百濟)의 군사(軍士)를 만나 왕(王)과 왕비(王妃)와 대신(大臣)들이 모두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하였다. 견훤(甄萱)은 왕(王)을 해치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백성(百姓)을 포로(捕虜)하여 돌아가니 신라(新羅)왕(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신하(臣下)들과 의논(議論)하고 고려(高麗)에 항복(降服)하려하니 태자(太子)가 통곡(慟哭)하면서 어찌 천년(千年) 조국(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왕(王)은 공연(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백성(百姓)의 생명(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항복(降服)하기로 결정(決定)하니 태자(太子)는 왕(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에 들어가서 마의(麻衣)를 입고 일생(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신검(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아울러 행(行)하여 불교(佛敎)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같은 명승(名僧)이 나고 원효(元曉)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불교(佛敎)의 교리(敎理)에 새로운 진보(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승(僧) 혜초(慧超)는 당(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편답(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팔(八) 세기(世紀) 무렵의 인도(印度) 사정(事情)을 전(傳)하는 유일(唯一)한 책(冊)으로 세계(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혜초(慧超) 이외(以外)에도 신라(新羅)의 중으로써 인도(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칠명(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유교(儒敎)에는 설총(薛聰)이외(以外)에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같은 명유(名儒)가 났는데 김대문(金大問)은 국가학(國家學)을 연구(硏究)하여 극진(極盡)히 환대(歡待)하였고, 발해(渤海)의 옛 남경(南京)을 수복(收復)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발해(渤海)가 망(亡)한 뒤로 만주(滿洲)의 대천지(大天地)는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계단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