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

임진왜란 (삼화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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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 초(初)에 일본(日本)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국내(國內)를 통일(統一)하고 장차(將次)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할 야심(野心)이 있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국(兩國)이 서로 친화(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 나라에 침입(侵入)할 뜻이 있다는 풍설(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선조(宣祖) 이십삼년(二十三年)에 조정(朝廷)에서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그 형식(形式)은 양국(兩國) 수호(修好)를 위(爲)함이나 기실(其實)은 수길(秀吉)의 태도(態度)를 타진(打診)함이다. 황(黃)과 김(金)이 돌아온 후(後) 두 사람의 복명(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황(黃)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안광(眼光)이 빛나고 태도(態度)가 거만(倨慢)하니 반드시 입구(入寇)하리라 하고 김(金)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인물(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입구(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황(黃)은 서인(西人)임으로 서인(西人)들은 덮어놓고 황(黃)의 말을 옳다하고 김(金)은 동인(東人)임으로 동인(東人)들은 김(金)의 말을 지지(支持)하여 국가명일(國家明日)의 흥망(興亡)이 달려있는 중대(重大) 사(事)에 적(敵)의 실정(實情)을 깊이 검토(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당인(黨人) 옹호(擁護)만을 위주(爲主)하였으며 이때 동인(東人)의 세력(勢力)이 컸음으로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은 김(金)의 말을 좇게되고 선조(宣祖)도 또한 김(金)이 선사(善使)하였다 하여 포상(褒賞)하고 착수(着手)중(中)에 있는 남방(南方)의 군비(軍備)도 수면상태(睡眠狀態)에 빠지고 군신(君臣)이하(以下)가 모두 태평몽(泰平夢)에 취도(醉倒)하였다.
일본(日本) 수길(秀吉)은 우리 나라의 군비(軍備)의 허실(虛實)을 전일(前日)의 사신(使臣) 왕래(往來) 시(時)에 미리 탐지(探知)하고 선조(宣祖) 이십오년(二十五年) 임진(壬辰)(단기 삼천구백이십오년)에 명(明)나라를 치러가니 조선(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빙자(憑藉)하고 그해 사월(四月)에 군사(軍士) 이십만(二十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등(等) 장수(將帥)를 보내어 풍우(風雨)같이 몰려와서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청천벽력(靑天霹靂)이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던 아국(我國) 군대(軍隊)가 백전(百戰) 노련(老鍊)한 왜병(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동래성(東來城)이 일전(一戰)도 못하고 함락(陷落)되고 적군(敵軍)은 거침없이 동서(東西) 두 길로 나뉘어 경성(京城)을 향(向)하여 북상(北上)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이 급보(急報)를 듣고 모두 창황망조(蒼皇罔措)하고 선조(宣祖)는 김식일(金識一)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엄명(嚴命)을 내리더니 성일(誠一)이 황공(惶恐) 입경(入京)하는 차(次)에 선조(宣祖)는 다시 명령(命令)을 내리어 이번 왜구(倭寇)는 너로 인(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남방(南方)으로 보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적(敵)을 막을 힘이 없고 서로(西路)를 좇아 피난(避難)의 길을 떠나니 경성(京城) 안에 있던 난민(亂民)들이 경복궁(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각지(各地)의 수령(守令)들은 대부분(大部分)이 직무(職務)를 버리고 도망(逃亡)하였음으로 호구(戶口)와 토지(土地)의 문적(文籍)이 이때에 대개(大槪) 멸실(滅失)되었다. 왜병(倭兵)이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지 겨우 이십일(二十日)만에 경성(京城)이 함락(陷落)되고 팔도(八道) 인심(人心)이 토붕(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수습(收拾)할 수가 없었다. 선조(宣祖)는 서로(西路)를 피난(避難)하면서도 서도(西道)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크게 의구(疑懼)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경(卿)이 일직 안주(安州)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 행정(行政)을 잘하여 평안도(平安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생각한다하니 경(卿)이 먼저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안무(按撫)하라하고 또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경(卿)이 일직 황해(黃海)감사(監司)사가 되었을 때 백성(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황해도(黃海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경(卿)이 먼저 황해도(黃海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개성(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왜병(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평양(平壤)을 거쳐서 의주(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국세(國勢)가 이렇게 위태(危殆)로운 지경(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국내(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생기(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이순신(李舜臣)의 해전(海戰)이오 또 하나는 의병(義兵)의 궐기(蹶起)이다. 이순신(李舜臣)은 전라도(全羅道) 좌수사(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왜적(倭賊)의 침입(侵入)이 있을 것을 짐작(斟酌)하고 우수(優秀)한 전선(戰船)을 제조(製造)하려 하여 백제(百濟) 시대(時代) 이래(以來) 고려(高麗) 시대(時代)로 거쳐서 전(傳)해오는 아국(我國) 특유(特有)의 조선(造船)기술(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창조(創造)하니 그 배는 철판(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적병(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십자로(十字路)를 통(通)하여 우리 군사(軍士)가 자유(自由)로 통행(通行)하게 하고 전후(前後)좌우(左右)에 총혈(銃穴)을 내어서 군사(軍士)가 그 밑에 숨어 총(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구선(龜船)이라 한다.
이순신(李舜臣)은 왜병(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구선(龜船) 팔십척(八十隻)을 거느리고 오월(五月) 칠일(七日) 옥포(玉浦)에서, 유월(六月) 사일(四日)에 당포(唐浦)에서, 칠월(七月) 팔일(八日)에 한산도(閑山島)의 앞바다 등(等) 적(敵)의 수군(水軍)을 연(連)거푸 쳐 부시고 한산도(閑山島)의 길목을 수비(守備)하니 적(敵)이 다시 남해(南海) 변(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왜병(倭兵)은 육로(陸路)와 해로(海路)의 두 길로 병진(倂進)하여 일거(一擧)에 우리 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해로(海路)가 이순신(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육로(陸路) 군(軍)의 동(東)은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까지 들어가고 서(西)는 평양(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북상(北上)하기를 두려하여 왕(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대란(大亂)에 우리 나라가 다시 소생(蘇生)함에는 이순신(李舜臣)의 힘이 절대(絶對)한 것이었다.
왜병(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인심(人心)이 모두 황겁(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적(敵)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총(銃)의 위력(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감(敢)히 접전(接戰)할 용기(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시일(時日)이 경과(經過)함을 따라 점차(漸次)로 적(敵)의 정세(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거의(擧義)하려는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경상도(慶尙道)에서 처음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者)는 곽재우(郭再祐)(호(號)는 망우당(忘憂堂))이니 홍의(紅衣)를 입고 마(馬)를 타고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횡행(橫行)하되 적(敵)이 감(敢)히 막지 못하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적(敵)이 반드시 피거(避去)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광주(光州)의 고경명(高敬命)(호(號)는 제봉(霽峰))이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와 김천일(金千鎰) 등(等)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이 소식(消息)을 듣고 각지(各地)에서 의병(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중(中)에 의병(義兵)의 세력(勢力)이 가장 큰 곳이 호남(湖南)이었고 이 의병(義兵)의 힘에 의하여 호남(湖南)이 보전(保全)된 까닭에 국가(國家)의 생맥(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호남(湖南) 의병(義兵)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군(軍)과 아울러 유명(有名)한 것은 금산(錦山)의 조헌(趙憲)(호(號)는 중봉(重峯))군(軍)이다. 조헌(趙憲)은 임진(壬辰) 전년(前年)에 미리 명년(明年)에 큰 병란(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선조(宣祖)에게 상소(上疏)하여 정치(政治)의 잘못됨을 통론(痛論)하고 급(急)히 방비(防備)의 책(策)을 세울 것을 극언(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과격(過激)함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광인(狂人)이라 하여 귀양보내었다.
임진(壬辰)란(亂)이 일어남에 동지(同志)를 모아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원근(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헌(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용관(聳觀)하고 우국(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번 왜병(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금산(錦山)싸움에서 중과(衆寡)과가 부적(不適)하여 패사(敗死)하고 동지(同志)인 칠백의사(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전쟁(戰爭)하던 자리에 칠백의사(七百義士) 총(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왜병(倭兵)도 죽은 자(者)가 많고 또 전쟁(戰爭)의 후방(後方) 세력(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전라도(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호남(湖南)북부(北部)의 보전(保全)함은 주(主)로 조헌(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각도(各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큰 전공(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적병(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횡행(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 나라 백성(百姓)에게 한줄기의 기(氣)를 넣어준 공(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특(特)히 승병(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승(僧) 유정(惟政)(호(號)는 사명산인(泗溟山人))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로서 승병(僧兵)을 모아 비록 실전(實戰)에는 참가(參加)치 아니하였으나 물자(物資)의 운반(運搬)과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큰 조력(助力)을 하였다.
이때 국군(國軍)들도 점차(漸次)로 세력(勢力)을 얻어서 왜병(倭兵)을 쳐 부시려는 용기(勇氣)를 내게되고 권율(權慄)은 이기(梨崎)(배티,대둔산부근)에서,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에서,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정도(程度)의 병력(兵力)만으로는 전국(全國)에 가득히 찬 적(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왕(王선조(宣祖))은 의주(義州)에 있어서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호(號)는 백사(白沙) 이덕형(李德馨)(호(號)는 한음(漢陰)등(等)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하는데 난(亂)이 일어난 후(後)에 당쟁(黨爭)은 일시(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저류(底流)에는 여전(如前)이 동서(東西)의 알력(軋轢)이 있음으로 왕(宣祖王)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이상(異常)한 와언(訛言)이 전파(傳播)되어 조선(朝鮮)이 왜(倭)와 공모(共謀)하여 명국(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증거(證據)로는 왜병(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결전(決戰)도 없이 왕(王宣祖)은 압록강(鴨綠江) 변(邊)까지 들어오고 왜병(倭兵)은 평양(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청병(請兵)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를 변명(辨明)하고 또 원병(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일본수길(日本秀吉)이 장차(將次) 명(明)나라를 치기 위(爲)하여 조선(朝鮮)에 길을 빌려달라 하고 조선(朝鮮)이 그를 거절(拒絶)하자 곧 침입(侵入)한 사정(事情)과 명국(明國)의 울타리가 되고있는 조선(朝鮮)이 명국(明國)을 대신(代身)하여 왜구(倭寇)의 화(禍)를 받고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실(確實)히 알게되고 이에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보내기로 결정(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사만(四萬)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평양(平壤)의 적(敵)을 대파(大破)하니 적(敵)이 개성(開城) 방면(方面)으로 물러났다. 이여송(李如松)은 적(敵)을 경(輕)히 여기고 추격(追擊)하여 벽제관(碧蹄舘)에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다시 추격(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적(敵)을 파(破)하니 적(敵)은 제해권(制海權)을 잃어서 보급(補給)이 끊어지고 또 평양(平壤)과 행주(幸州)에서 대패(大敗)하여 기세(氣勢)가 점점(漸漸) 줄어들더니 이여송(李如松)이 명(明)나라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시켜서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의 사이에 화의(和議)를 진행(進行) 시켰음으로 왜병(倭兵)은 이해 사월(四月)에 경성(京城)을 물러나서 남해안(南海岸)으로 내려갔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계획(計劃)을 세우고 또 전일(前日)에 진주(晉州)에서 패(敗)한 것을 분(憤)하게 여겨서 십여만(十餘萬)의 군사(軍士)로 진주성(晉州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전번(前番)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晉州) 싸움에 대승(大勝)할 때는 수천병(數千兵)으로써 적(敵)의 십만병(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성중병(城中兵)이 육만(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성(城)을 지키기에 아무 염려(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진주(晉州) 기생(妓生) 논개(論介)가 근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이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논개(論介)가 대답(對答)하되 전번(前番)에는 군사(軍士)가 비록 적으나 장수(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호령(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군사(軍士)가 비록 많으나 통솔(統率)이 없고 장수(將帥)가 병(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성중(城中)은 구일(九日) 구야(九夜)의 동안에 백여(百餘)차례를 싸워서 번번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성(城)이 함락(陷落)하고 성중(城中)의 백성(百姓)들까지 모두 칠만명(七萬名)이 죽으니 그 참혹(慘酷)하기가 임진란(壬辰亂) 중(中)에서도 가장 심(甚)하였고 논개(論介)는 적장(敵將)에 끌려서 촉석루(矗石樓) 아래의 암상(岩上)에서 적(敵)의 주연(酒宴)에 나갔다가 적장(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강중(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후인(後人)이 이 암석(岩石)을 의기암(義妓岩)이라고 이름지었다.
왕(王宣祖)은 경성(京城)이 수복(收復)한 후(後) 경성(京城)을 떠난지 일년반(一年半)만에 구도(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왜병(倭兵)이 아직 남방(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의 대(對)하여는 반대(反對)의 태도(態度)를 취하고 명(明)나라에 적극(積極) 남공(南攻)하기를 청(請)하였다 명(明)나라에서는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원수(遠輸)하기가 곤란(困難)하다하여 구차(苟且)히 화의(和議)를 성립(成立)시키려하니 왕(王宣祖)은 국력(國力)이 약(弱)하여 독력(獨力)으로 왜(倭)를 섬멸(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군제(軍制)의 대(大) 개혁(改革)을 제안(提案)하니 이 안(案)은 예(隸)를 해방(解放)하여 군사(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군제(軍制) 개혁(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제도(社會階級制度)의 일대(一大) 혁명(革命)이 되는 것이다.
아국(我國)의 군제(軍制)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군역(軍役)이 면제(免除)되고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천인(賤人)이라 하여 군역(軍役)에 참여(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만일 천인(賤人)이 먼저 입대(入隊)하여 군교(軍校)가 되고 양민(良民)이 후(後)에 입대(入隊)하여 병졸(兵卒)이 되면 양민(良民)이 천인(賤人)의 지휘(指揮)를 받게되어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양민(良民)이나 천인(賤人)이나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오 또 국가(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때 군사(軍士)가 부족(不足)한 현실(現實)을 타개(打開)하려면 수십만(數十萬)의 천인(賤人) 장정(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종래(從來)의 계급제도(階級制度)를 깨뜨리고 천인(賤人)을 양민(良民)과 함께 군사(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제신(諸臣)들은 이를 잘 토의(討議)하라고 영(令)을 내렸다.
조정(朝廷) 제신(諸臣)중(中)에는 여기에 찬성(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사노(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강경(强硬)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이유(理由)는 노주(奴主)의 분(分)은 군신(君臣)의 분(分)과 같으매 만일 노예(奴隸)를 해방(解放)하여 양민(良民)을 만들면 이는 강상(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기실(其實)은 국가(國家)의 강상(綱常)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주장(主將)이 아니라 전(專)혀 노예(奴隸)를 부려서 호화(豪華)한 생활(生活)을 누리려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왕(王宣祖)의 제안(提案)이 마침내 통과(通過)되지 못하니 왕(王宣祖)은 「국가(國家)를 살리는 최선(最善)의 안(案)이 개인(個人)들의 사심(私心)때문에 실행(實行)되지 못하니 가탄(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제도(制度)를 공노(公奴)에게만 시행(施行)하였다. 공노(公奴)중(中)에는 주야(晝夜)로 무예(武藝)를 연습(練習)하여 군대(軍隊)에 들어가서 양민(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한편(便)으로 양반계급(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완전(完全)한 실시(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으로 물러간 후(後)에 명(明)나라와의 사이에 화의(和議)가 진행(進行)되어 차츰 본국(本國)으로 물러가더니 양국(兩國)의 대표(代表) 사이에 결정(決定)한 화의(和議) 조건(條件)과 명(明)나라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낸 칙서(勅書)의 내용(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선조(宣祖) 삼십년(三十年) 정유(丁酉)에 다시 대군(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유란(丁酉亂)이라 한다.
왜병(倭兵)은 전번(前番)의 실패(失敗)에 삼가서 수군(水軍)을 더 증가(增加)하고 또 미리 간첩(間諜) 요시라(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조정(朝廷)과 이순신(李舜臣)과의 사이를 이간(離間)하니 우리 조정(朝廷)에서는 그 모략(謀略)에 넘어가서 이순신(李舜臣)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고 장차(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의 이면(裏面)에는 역시(亦是) 당파(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조정(朝廷)이 의주(義州)에 있을 동안은 당쟁(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경성(京城)에 환도(還都)한 후(後)에 다시 재연(再燃)하여 북인(北人)의 세력(勢力)이 우세(優勢)한 판인데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유성룡(柳成龍)은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북인(北人)들은 이순신(李舜臣)을 당쟁(黨爭)의 희생(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이순신(李舜臣) 처치(處置)에 대(對)하여 의견(意見)을 유성룡(柳成龍)에게 물으니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李舜臣)은 명장(名將)이라 왜인(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죄(罪)줄 수도 없고 또 전란(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명장(名將)을 죽이는 것은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왕(王宣祖)은 이 말을 중(重)히 여겨 다만 면직(免職)시키고 석방(釋放)하니 이때 사신(史臣)은 이를 평(評)하기를 「남해(南海)를 홀로 지켜서 국맥(國脈)을 붙잡고 오던 명장(名將)이 적(敵)의 모개(謀介) 이간(離間)과 당쟁(黨爭)의 여파(餘波)로 이런 일을 당(當)하니 멀리 남방(南方)의 적세(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조정(朝廷)의 형편(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통곡(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면직(免職)된 뒤에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원균(元均)은 본시(本是)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사(水使)로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統制使)가 된 뒤에 그 부하(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항상(恒常) 이순신(李舜臣)을 조정(朝廷)에 모해(謀害)하던 자(者)이오 먼저에 이순신(李舜臣)이 죄(罪)를 받은 것도 원균(元均)의 모해(謀害)가 유력(有力)한 일인(一因)이 된 것이다. 왜병(倭兵)들은 원균(元均)이 이순신(李舜臣)을 대신(代身)함을 듣고 수군(水軍)을 크게 발(發)하여 우리 수군(水軍)을 치니 원균(元均)이 대패(大敗)하여 육지(陸地)에 올라와 도망(逃亡)하였는데 그 생사(生死)는 세상(世上)이 알지 못하며 적(敵)은 전라도(全羅道) 해안(海岸)을 점령(占領)하고 멀리 충청도(忠淸道)의 직산(稷山) 당진(唐津)에 까지 침입(侵入)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크게 당황(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李舜臣)으로 통제사(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왜병(倭兵)이 전라도(全羅道) 육지(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이순신(李舜臣)은 산곡(山谷)길을 좇아 우수영(右水營)에 이르니 전선(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십이척(十二隻)이라 피난선(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진도(珍島)의 울돌목(명량(鳴梁)에서 적선(敵船) 오백척(五百隻)을 무찌르고 고금도(古今島)를 무찌르니 적(敵)의 세력(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서해(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육지(陸地)에서는 명(明)나라 원군(援軍)이 남원(南原)에서 패(敗)하고 또 울산(蔚山) 사천(泗川) 순천(順天)등지(等地)에 진지(陣地)를 쌓고 적(敵)과 싸우다가 모두 패(敗)하였다.
적세(敵勢)가 다시 성(盛)함을 보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사람 김덕령(金德齡)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고 안광(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대적(對敵)하는 바가 없고 왜병(倭兵)이 두려하여 감(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충청도(忠淸道)에서 반란군(叛亂軍)이 일어나서 김덕령(金德齡)도 자기(自己)들과 합모(合謀)한다고 선전(宣傳)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곧 김덕령(金德齡)을 잡아다가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 무죄(無罪)함을 알았으나 김덕령(金德齡)은 이귀(李貴)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이귀(李貴)는 서인(西人)이라 동인(東人)이 조정(朝廷)안의 세력(勢力)을 잡고 있는데 김덕령(金德齡)의 목숨을 구원(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김덕령(金德齡)같은 용장(勇將)을 방면(放免)하였다가 후일(後日)에 만일 반란(叛亂)을 일으키면 억제(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 나라 군사(軍士)와 명(明)나라 군사(軍士)는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랫동안 적병(敵兵)과 대치(對峙)하고 있더니 선조(宣祖) 삼십일년(三十一年) 무술(戊戌) 십일월(十一月)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면서 왜병(倭兵)을 철수(撤收)시키는데 이순신(李舜臣)은 그 퇴로(退路)를 막고 경상도(慶尙道) 노량(露梁)에서 적(敵)을 맞아 싸워 크게 파(破)하더니 적(敵)의 탄(彈)알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적(敵)이 도환(逃還)한 자(者)가 겨우 오십여척(五十餘隻)에 불과(不過)하고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조정(朝廷)의 일부(一部)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만일 전승(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간신(奸臣)들의 모해(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전사(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탄(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日本)이 무단(無端)히 군사(軍士)를 일으켜서 인국(隣國)을 침략(侵略)하여 무고(無辜)한 인민(人民)을 함부로 살륙(殺戮)하고 우리 나라는 기근(饑饉)과 질병(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참혹(慘酷)한 화(禍)가 몽고(蒙古)의 침입(侵入)보다 더 심(甚)하였고 명(明)나라가 오랫동안 군사(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병폐(病弊)하였다.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우리 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횡폭(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관왕묘(關王廟)라 하여 중국(中國) 옛날의 관우장군(關羽將軍)을 모시고 선조(宣祖) 왕(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 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란(大亂)을 구(求)해 주는 은혜(恩惠)를 깊이 감사(感謝)하여 아무런 불평(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명(明)나라는 이 난리(亂離)에서 많은 군사(軍士)와 재물(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만주족(滿洲族)에게 망(亡)하게 되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명(明)나라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난리(亂離)에 무기(武器)의 발달(發達)한 것은 구선(龜船) 이외(以外)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대포(大砲)로써 이 포(砲)가 터지면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고 철편(鐵片)이 튀어 나가서 적(敵)을 해치는 것인데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석(朴昔)이 이 포(砲)를 써서 경주(慶州)를 회복(恢復)하였다. 왜병(倭兵)으로부터 얻은 조총(鳥銃)은 본시(本是) 일본(日本)이 서양(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 나라도 이 법(法)을 얻은 후(後)에 공장(工匠)에게 명령(命令)하여 제조(製造)하니 이가 우리 나라가 총(銃)을 사용(使用)한 처음이다. 왜병(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기술자(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특(特)히 그 중(中)에는 도공(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일본(日本)의 도자기(陶磁器) 공업(工業)이 이로부터 시작(始作)하였다. 왜병(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희생(犧牲)하고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 나라의 우수(優秀)한 기술(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무장(武裝)한 유학생(遊學生)을 조선(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후(後)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새로이 막부(幕府)를 열어서 이전(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국교(國交)를 회복(恢復)하기를 거듭 청(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수천(數千)명(名)의 포로(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에 대(對)한 복수심(復讐心)이 복 받혀서 허락(許諾)치 아니하더니 양국간(兩國間)에 오랫동안 국교(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전쟁(戰爭)이 끝난지 칠년(七年)만에(을사(乙巳))일본(日本)의 소원(所願)을 들어서 부산(釜山)에 다시 왜관(倭館)을 열고 대마도(對馬島)와의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하여 그 후(後) 삼백년(三百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