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할 무렵에 신라(新羅) 왕(王)이 승하(昇遐)하고 김춘추(金春秋) 알천(閼川) 두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할 후보(候補)자(者)가 되었는데 이인(二人)이 서로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하다가 춘추(春秋)가 왕(王)이 되니 이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이때 백제(百濟)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여러 번 신라(新羅)를 치다가 번번이 패(敗)하니 국세(國勢)가 위급(危急)하던 차 당(唐)나라 군사(軍士)가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이 장군(將軍)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백제(百濟) 장군(將軍) 계백(階伯)은 결사군(決死軍) 오천명(五千名)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김유신(金庾信) 군(軍)을 맞아 용감(勇敢)히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마침내 패(敗)하여 전사(戰死)하고 사비성(泗泌城)이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에게 떨어지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이 항복(降服)하니 이로써 백제(百濟)는 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에 亡하고 (단기 二千九百九十三年) 지금 부여(扶餘) 금강안(錦江岸)의 낙화암(落花岩)은 당시(當時) 궁녀(宮女)들이 도망(逃亡)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남긴 곳이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당(唐)나라의 근본(根本) 정책(政策)에 의(依)하여 그 군사(軍士)를 옮겨서 신라(新羅)를 치려하였다. 원래(原來) 외국(外國)의 군대(軍隊)를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하는 데는 마침내 그 군대(軍隊)의 침박(侵撲)을 받는 것이 고금(古今) 역사(歷史)의 통례(通例)라 무열왕(武烈王)과 김유신(金庾信)은 일직부터 외군(外軍) 이용(利用)의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잘알고 또 당(唐)나라의 야심(野心)을 이미 간파(看破)한 터이라 한편(便)으로 백제(百濟)에 출병(出兵)하면서 한편(便)으로 국내(國內)를 굳게 지키니 소정방(蘇定方)이 그 기미(機微)를 알고 감(敢)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김유신(金庾信)으로써 명장(名將)이라고 칭(稱)하는 소이(所以)이오 후세(後世)에 자국내(自國內)를 텅텅 비워 놓고 외군(外軍)을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한다는 것은 가장 우매(愚昧)한 것이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등(等) 오(五) 도독부(都督附)를 두었는데 백제(百濟) 유민(遺民)들의 광복운동(光復運動)으로 말미암아 당(唐)나라의 군정(軍政)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왕족(王族) 복신(福信)이 승(僧) 도침(道琛)과 더불어 지금 한산(韓山)부근(附近)인 주류성(周留城)에서 군사(軍士)를 일으켜 일본(日本)에 가 있는 왕자(王子) 풍(豊)을 세워 임금을 삼고 고구려(高句麗)와 일본(日本)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한동안 그 기세(氣勢)가 떨치더니 나중에 내부(內部)의 세력(勢力) 다툼으로 말미암아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풍왕(豊王)이 또 복신(福信)을 죽여서 마침내 모두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칠 준비(準備)를 시작(始作)하였다. 이때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남생(男生)이 정권(政權)을 잡았는데 가족(家族)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우 정사(淨士)는 十二城으로써 신라(新羅)에 가서 붙고 남생(男生) 그 아우 남달(男達)이 서로 시기(猜忌)하여 싸움이 일어나더니 남생(男生)은 당(唐)나라에 항복(降服)하여 본국(本國)의 군사기밀(軍事機密)을 일일이 고(告)하였다. 당(唐)나라 임금 고종(高宗)은 어버이 태종(太宗)의 뜻을 이어 육차(六次)나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으로 평생(平生)의 한(恨)으로 여기던 터이라 장군 이적(李勣)을 시켜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 가게하고 이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도 군사(軍士)와 식량(食糧)을 내어 당군(唐軍)을 도왔다. 고구려(高句麗)는 나라 일이 어지러운 데에 흉년(凶年)이 겹 들여서 매우 곤경(困境)에 빠졌으나 그래도 二年동안이나 지탱(支撑)하다가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되니 (단기 三千一年) 백제(百濟)가 망(亡)한 후(後) 팔년(八年)만이오 그 역연수(歷年數)는 졸본(卒本) 부여(扶餘) 건국(建國)으로부터는 팔백(八百) 여년(餘年)이오 주몽(朱夢)으로부터는 二十八王 七百五年으로 망(亡)하였다.
당(唐)나라는 평양(平壤)에 동도호부(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高句麗) 고지(故地)를 구(九) 도독부(都督府)로 나누고 고구려(高句麗) 백성(百姓)을 많이 중국(中國)으로 옮겨갔다.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일변령(釰弁令)은 왕족안승(王族安勝)을 받들어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일으키고 신라(新羅)가 또 이를 도와서 당(唐)나라에 대항(對抗)하였음으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승(安勝)이 일변령(釰弁令)을 죽여서 광복운동(光復運動)은 중심(中心)을 잃어버리고 안승(安勝)은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칠 때에는 그 토지(土地)를 신라(新羅)가 통일(統一)할 생각이었으나 두 나라가 망(亡)한 후(後)에 당(唐)나라가 그 땅을 모두 점령(占領)하고 신라(新羅)는 도리어 당(唐)나라의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 문무왕(文武王)은 두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을 도와서 당(唐)나라와 싸우게 하더니 마침내 당(唐)나라와 직접(直接) 싸우기로 결정(決定)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 이년후(二年後)부터 칠년(七年)동안 싸움을 계속(繼續)하던 끝에 실력(實力)으로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대동강(大洞江) 이남(以南)의 땅을 찾아서 비로소 삼한(三韓) 통일(統一)의 업(業)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