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9.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서당국사)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삼국(三國)에는 국문(國文)이 없고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을 수입(輸入)하여 썼으므로 일부(一部) 귀족계급(貴族階級)은 그것을 이용(利用)할 수 있었으나 일반(一般)백성(百姓)은 아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고 한문자(漢文字)가 국어(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기록(記錄)할 때에는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향가(鄕歌)가 그 예(例)이다. 신라(新羅)가 삼한통일(三韓統一)뒤에 오륙백년(五六百年)의 전화(戰禍)로부터 비로소 해방(解放)되어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유학생(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성당(盛唐)의 찬란(燦爛)한 문물(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동시(同時)에 한문(漢文) 열(熱)도 상당(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한문학자(漢文學者) 설총(薛聰)은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어 경서(經書)를 해석(解釋)하여 생도(生徒)를 가르치고 종전(從前)에는 지명(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에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식(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국민사상(國民思想)의 일대(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불교(佛敎)는 아국(我國)에 들어온 후(後) 건축(建築), 조각(彫刻), 야금(冶金),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을 전래(傳來) 하여 불교(佛敎) 광포(廣布)와 함께 널리 보급(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그 발생(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를 전후(前後)하여 힘있게 발전(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황룡사(皇龍寺)의 구층탑(九層塔), 첨성대(瞻星臺),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시대(時代)의 만든 유물(遺物)이다.
토지제도(土地制度)는 삼국(三國) 정립(鼎立) 당시(當時)에는 유족(遺族)들이 대 면적(大 面積)을 차지하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경작(耕作)하고 일반(一般)농민(農民)은 각기(各其) 일정(一定)한 면적(面積)을 가지고 농사(農事)지으며 이때는 지(地)가 많고 인구(人口)가 비교적(比較的) 적고 유식민(遊食民)을 구(驅)하여 강제(强制)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고 농업(農業)에 종사(從事)케 하였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당(唐)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배워서 정전제(丁田制)를 만들고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십오세(十五歲)부터 장정(壯丁)이라 하여 국가(國家)로부터 분배(分配)받고 육십세(六十歲)에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며 공신(功臣)유족(遺族)들에게 사전(賜田)을 주어 토지(土地)의 수세권(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