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勢道)정치(政治)
세도(勢道)라 함은 본시(本是) 왕(王)과 신하(臣下)들 사이를 주선(周旋)하는 소임(所任)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정치(政治)가 그의 손을 거치게 됨으로 스스로 세력(勢力)을 잡게된 것이다. 정조(正祖)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에 세손(世孫)을 해(害)하려 함으로 홍국영(洪國榮)이 세손(世孫)을 극진(極盡)히 보호(保護)하여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고 및 즉위(卽位)한 뒤에 홍국영(洪國榮)으로써 숙위대장(宿衛大將)을 삼으니 궁중(宮中)을 지키면서 부터 소위(所謂) 세도(勢道)가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은 횡포(橫暴)한 일이 많음으로 미구(未久)에 물러나더니 정조(正祖)의 뒤를 이은 순조(純祖)가 왕(王)이 되니 때에 나이 십일세(十一歲)이었다. 그래서 영조(英祖)의 후인(后人)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대신(代身) 국사(國事)를 처리(處理)하고 그 본가편(本家便)의 김조순(金祖淳)이 실권(實權)을 잡으니 세상(世上)에서 이 정치(政治) 형태(形態)를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勢道)라고 칭(稱)하고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三代)가 모두 안동(安東) 김씨(金氏)에게 장가를 들어서 이 뒤 육십년(六十年)동안에 김씨(金氏)가 외척(外戚)으로써 세도(勢道)를 잡고 나가니 이것이 척리파(戚里派)의 완전(完全)한 재(再)등장(登場)이다.
세도(勢道)정치(政治)가 벌어진 후(後)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풍습(風習)이 날로 심(甚)하고 관직(官職)을 매득(買得)한 무리들은 백성(百姓)들을 토색(討索)하여 재산(財産)을 잡으려하고 한 편(便) 서원(書院)을 중심(中心)으로 한 양반들이 무고(無辜)한 백성(百姓)들을 잡아다가 억울(抑鬱)한 죄(罪)를 얽어서 재물(財物)을 함부로 빼앗고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이 여러 가지 농간(弄奸)으로 민재(民財)를 착취(搾取)하니 백성(百姓)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음으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아니하여 모든 산업(産業)이 위축(萎縮)하니 평안지방(平安地方) 같은 곳은 고래(古來)로 율목(栗木) 재배(栽培)가 성행(盛行)하여 율산(栗産)이 전국(全國)에 유명(有名)하더니 율목(栗木)이 있는 까닭으로 전일(前日) 남(南)쪽 지방(地方)에서 고구마 재배(栽培)로 인(因)하여 파산(破産)하는 일이 있음과 같은 억울(抑鬱)한 사정(事情)이 도처(到處)에 생겼음으로 일제(一齊)히 율목(栗木)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이조(李朝)의 정치(政治)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라 하니 이는 국가(國家) 정치(政治)에 가장 근본(根本)이 되는 재정(財政)문제(問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전정(田政)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을 근거(根據)로 하여 받는 세납(稅納)이오 군정(軍政)이라 함은 군포(軍布)이오 환곡(還穀)이라 함은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百姓)들에게 곡식(穀食)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얼마쯤의 이식(利息)을 붙여서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고구려(高句麗) 시대(時代)의 진대(賑貸)의 진대법(賑貸法)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