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9.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서당국사)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과 어염(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신라(新羅)에는 재상가(宰相家)의 노복(奴僕)이 삼천인(三千人)에 달하고 우마(牛馬)의 수(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돈이 없고 미곡(米穀)과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사용(使用)하니 이것은 고대(古代)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유풍(遺風)이오 지금에 호남(湖南)지방(地方)에서 미곡(米穀)에 한(限)하여 매(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매(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삼국(三國) 이래(以來) 미곡(米穀) 마포(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유속(遺俗)이다.
삼국(三國)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의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고구려(高句麗)는 이십일만여호(二十一萬餘戶)이오 신라(新羅)는 십칠만여호(十七萬餘戶)이오 백제(百濟)는 십오만여호(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한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인구(人口)가 일호(一戶)에 오인(五人)으로 잡더라도 칠십만(七十萬) 혹(或)은 백만(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도성(都城)이 팽창(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있으니 이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도성(都城)이 수삼개월(數三個月) 적군(敵軍)의 포위(包圍)를 당(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포위(包圍)에는 식량(食糧) 무기(武器)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生活品)을 도성내(都城內)에서 자급자족(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각국(各國)의 도성내(都城內)에는 첫째로 무기(武器)를 제조(製造)하는 공장(工場)이 있고 거기에 종사(從事)하는 기술자(技術者)및 노무자(勞務者)등(等) 백공(百工)이 있고 큰 시장(市場)도 이 도성내(都城內)에 집중(集中)되어 있었다. 국가(國家)가 도성(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공장(工場)과 백공(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이 팽창(膨脹)한 것은 자연(自然)의 이(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