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

정치의 문란 (삼화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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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고려(高麗)는 농업(農業)으로써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삼았음으로 토지생산(土地生産)은 국민생활(國民生活)의 기초(基礎)가 되고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지주(支柱)가 되고 호구(戶口)의 정비(整備) 군사(軍士)의 징발(徵發) 등(等)이 모두 토지(土地)의 수수제도(授受制度)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니 국가(國家)의 흥폐(興廢), 정치(政治)의 선부(善否)가 모두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여하(如何)에 달려 있었다. 몽고란(蒙古亂) 이후(以後)로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폐해(弊害)를 생(生)한 것이 토지제도(土地制度)였다.
처음에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으로써 농민(農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의 수조권(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현물(現物) 운반(運搬)의 불편(不便)을 덜기 위(爲)한 방편(方便)에 불과(不過)한 것이오 그 관리(官吏)에게 토지(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관리(官吏)와 농민(農民)과의 사이에 신분적(身分的)으로 노주관계(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토지(土地) 생산물(生産物)의 십분일(十分一)을 관리(官吏)에게 주면서도 부역(賦役)이나 호세(戶稅)는 국가(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농노제(農奴制)와는 그 성질(性質)이 전연(全然) 다르다.
그런데 국가(國家)의 질서(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권신(權臣) 귀족(貴族) 토호(土豪)들은 그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농민(農民)에 대(對)하여 국가(國家)의 호구장(戶口帳)에서 삭거(削去)하고 국가(國家)에 바쳐야 할 부역(賦役)과 호세(戶稅)를 자기(自己)가 사취(私取)하니 국가(國家)의 공민(公民)의 수(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호적(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토지수수법(土地授受法)이 제대로 실행(實行)되지 못함으로 인(因)하여 병역(兵役)을 부담(負擔)할 장정(壯丁)의 수(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한편(便)으로 간인(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농간(弄奸)을 하여 일찍 관리(官吏)가 병정(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도적(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공전(公田)을 사사(私私)로이 아들에게 세습(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은익(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고려(高麗) 토지(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에 대하여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자칭(自稱)하는 자가 六七人에 달(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국가(國家)에서 인정(認定)한 수조권(收租權)자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농민(農民)이 지은 일년(一年) 농사(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전수(公田數)가 줄어들고 국가(國家)에 들어가는 전조(田租)가 또한 중간(中間)에서 횡령(橫領)되어 국가재정(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군색(窘塞)하였고 혹(或) 현상(賢相)이 들어 있어 이 폐해(弊害)를 그치려하되 반근착절(盤根錯節)한 권신(權臣)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농민(農民)들은 하루바삐 정국(政局)에 대변동(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정치(政治)가 나오기를 갈망(渴望)하였다.
세상(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관리(官吏)의 부패(腐敗)는 극도(極度)에 달(達)하여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항다반사(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사관(史官)들은 이를 평(評)하여 말하되 응견(鷹犬)을 치토(雉兎)의 장(場)에 방(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고려(高麗)문화(文化)에 중심(中心)이 되고 있는 불교(佛敎)에도 폐해(弊害)가 생(生)하여 승려(僧侶)들은 특권(特權)을 믿고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사찰(寺刹)에서 음범(淫犯)을 행(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정계(政界)와 함께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불만(不滿)을 가진 유신중(儒臣中)에는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는 소리가 점점(漸漸) 높아지고 유교(儒敎) 장려(獎勵)의 선진(先陣)에 나선자(者)가 안향(安珦)이다. 안향(安珦)는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유교(儒敎)의 모든 의식(儀式)을 전(傳)해오고 또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 즉(卽)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와서 후진(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시초(始初)이오 이어서 이색(李穡)(호(號) 목은(牧隱)) 정몽주(鄭夢周)(호(號) 포은(圃隱)) 같은 대유(大儒)를 생(生)하니 당시(當時) 정몽주(鄭夢周)는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조(祖)라 칭(稱)하였고 이 연원(淵源)이 이조(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성리학(性理學)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