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

외국관계 (삼화서당국사)

 
외국(外國)관계(關係)
원(元)나라가 아세아(亞細亞) 대륙(大陸)에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사방(四方)에 도적(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형편(形便)이라 공민왕(恭愍王)은 세자(世子)때에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기회(機會)에 원(元)나라 세력(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왕(王)의 오년(五年)(단기 삼육팔구년)에 원(元)나라에서 고려(高麗)에 설치(設置)하여둔 정동행자(征東行者)를 파(罷)하고 전일(前日)에 원(元)나라에게 빼앗긴 동북면(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요동(遼東) 등지(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압록강(鴨綠江)저편(便)의 팔참(八站)을 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동북면(東北面)의 쌍성(雙城) 이북(以北)을 수복(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북방(北方) 민족(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대고구려주의(大高句麗主義)가 다시 한번 광채(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원(元)나라의 홍두적(紅頭賊)이란 도적(盜賊)의 무리 십여만명(十餘萬名)이 우리 나라에 근거(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고려(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도적(盜賊)의 기세(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왕(王)은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지(等地)로 피난(避難)하니 적(賊)이 송경(松京)을 함락(陷落)시켜서 궁궐(宮闕)과 모든 재보(財寶) 문헌(文獻)이 탕진(蕩盡)하였다. 수일(數日)후(後)에 정세운(鄭世雲)이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등(等) 삼원수(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파(破)하니 적(敵)의 태평(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왕(王)은 기어(期於)코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이성계(李成桂)등(等)으로 하여금 요양성(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고지(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물론(勿論) 요하(遼河)까지가 본시(本是) 우리의 지경(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형편(形便)으로도 원(元) 나라가 고려(高麗)를 누르고 국경(國境)을 南으로 뻗은 반면(反面)에 백성(百姓)들은 이 분명(分明)치 않은 지경(地境)을 믿어서 전(前)날 보다도 더 북(北)쪽으로 나갔음으로 요동(遼東) 평야(平野)에 고려(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요양(遼陽)에 고려군민총독부(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고려(高麗)의 국정(國情)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대륙정책(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나라는 북(北)으로 만주대륙(滿洲大陸)과 접(接)하고 동(東)으로 일(一) 해협(海峽)을 격(隔)하여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외교관계(外交關係)와 국방(國防)관계(關係)는 항상(恒常)이 두 방면(方面)에서 생겼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왜구(倭寇)는 고려(高麗)를 멸망(滅亡)케 한 일인(一因)이 된 대사건(大事件)이라 원래(元來) 왜구(倭寇)는 일본(日本)사람의 해적(海賊)떼로서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고려(高麗)와 송(宋)나라의 해안지방(海岸地方)을 노략(擄掠)질 하여 대대(代代)로 내려오면서 약탈(掠奪) 강도(强盜)로 업(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더욱 심(甚)하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물론(勿論)이오 차츰 육지(陸地)로 들어오고 또 남방(南方)을 휩쓴 뒤에 북(北)으로 뻗어서 경기도(京畿道)의 강화(江華) 풍덕(豊德)같은 서울의 지척(咫尺)에까지 미쳤다.
해안지방(海岸地方) 사람들은 안도(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육지(陸地)로 들어가고 양전옥답(良田沃畓)에 갈대가 무성(茂盛)하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곡식(穀食)이 많이 나는 토지(土地)는 주(主)로 연해안(沿海岸)에 있는데 해안지방(海岸地方)에 농민(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토지(土地)가 황무(荒蕪)로 화(化)한 까닭에 국내(國內)의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하고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이 또한 군색(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왜구(倭寇)가 삼십여년(三十餘年)을 계속(繼續)하는 동안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로 왜구(倭寇)를 대파(大破)한 일이 있고 최무선(崔茂宣)이 원(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는 방법(方法)을 배워 아국(我國) 최초(最初)의 화기(火器)를 만들어서 전라도(全羅道) 진포(鎭浦)에서 왜구(倭寇)의 배 삼백척(三百隻)을 단번(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왜구(倭寇)의 기세(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우왕(禑王)때에는 왕도(王都)를 깊은 육지(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정몽주(鄭夢周)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금(禁)해 달라고 청(請)한 일도 있었으며 임진강(臨津江) 어구(於口)로부터 남안(南岸)을 거쳐 멀리 동해안(東海岸)의 함주(咸州) 해안(海岸)에 이르기까지 연장(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왜구(倭寇)의 난무(亂舞)장(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연작(鷰雀)이 임목(林木)에 귀소(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왜구중(倭寇中)에는 일본(日本) 해적(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고려(高麗)사람으로서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와 생활(生活)이 곤난(困難)한 자(者)가 왜구(倭寇)노릇을 하는 가(假) 왜구(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방비(防備)가 허소(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왜구(倭寇)가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왜구(倭寇)의 대부대(大部隊)가 전라도(全羅道) 운봉(雲峰)으로 모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부하장(部下將) 동두란(佟豆蘭)과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황산(荒山) 서북(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왜구(倭寇)의 아지발도(阿只拔都) 대장(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왜구(倭寇)의 기세(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전일(前日)과 같이 횡행(橫行)하지 못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개선(凱旋)하는 대로(大路)변(變)에는 백성(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환영(歡迎)하고 최영(崔瑩)은 이성계(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공(功)을 칭사(稱謝)하니 이에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일세(一世)를 덮어서 후일(後日) 혁명(革命)의 기지(基地)를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