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

난후의 형세 (삼화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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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후(亂後)의 형세(形勢)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기경(起耕)치 못한 토지(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생계(生計)를 잃은 백성(百姓)이 수(數)없이 많고 산곡(山谷)에 피난(避難) 갔던 사람들은 기아(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면서 겨우 고향(故鄕)에 돌아 왔으나 의지(依支)할 곳이 없어서 도로(道路)에서 방황(彷徨)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이러한 난민(難民)에 대(對)하여 아무런 구제책(救濟策)이 없었고 더욱이 난중(亂中)에 국적(國籍)의 대부분(大部分)이 없어졌는데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모경(冒耕)하여 자기(自己)의 토지(土地)를 만들려하니 도처(到處)에서 전송(田訟)이 일어나되 관가(官家)에서 이를 적당(適當)하게 처리(處理)치 못하였고 조정(朝廷)에서는 토지측량(土地測量)에 착수(着手)하였으나 사무(事務)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잘 진척(進陟)되지 아니 하였다. 한 편(便)으로는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여 북인(北人)들 끼리에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눠져서 그 세력(勢力) 다툼은 일보(一步)를 나아가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과 엉켜지게 되었으니 이는 관인(官人)들 끼리에만 세력(勢力)을 다투기 보다 세력(勢力)의 발원(發願)인 군왕(君王)을 자기들 편(便)에 넣는 것이 가장 유력(有力)하기 때문이다. 당쟁(黨爭)이 이와 같이 심각(深刻)하게 되니 난후(亂後)의 모든 정리(整理)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效果)를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선조(宣祖)의 다음 임금 광해군(光海君)은 본시(本是) 난중(亂中)에 인심(人心)을 수습(收拾)하려고 갑자기 세자(世子)로 세운 것이라 선조(宣祖)가 이를 바꾸려는 뜻이 있었다. 이 기미(機微)를 알고 소북파(小北派)는 선조(宣祖)의 뜻을 받들려 하고 대북파(大北派)는 세자(世子)를 옹호(擁護)하여 서로 다투더니 선조(宣祖)가 병중(病中)에 대북파(大北派)를 척축(斥逐)하던 중(中) 급졸(急猝)히 승하(昇遐)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王位)에 오르고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等)이 세력을 잡으니 항간(巷間)에서는 선조(宣祖)가 과독(過毒)하였다고 전(傳)했다.
당시(當時) 세납(稅納)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로써 바치는 조세(租稅)와 지방(地方)의 특산물(特産物)을 바치는 공물(貢物)과 병역(兵役)과 부역(賦役) 대신(代身)으로 바치는 군포(軍布)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폐해(弊害)가 따르고 더욱이 대란(大亂)을 치른 후(後)로 토지제도(土地制度)와 세제(稅制)가 극도(極度)로 문란(紊亂)하여졌음으로 광해군(光海君) 즉위(卽位) 초(初) 이원익(李元翼)(호(號) 오리(梧里))이 대동법(大同法)을 설(設)하기를 청(請)하였다. 이 법(法)은 선혜청(宣惠廳)이라는 기관(機關)을 두고 매년(每年) 춘추(春秋)에 전(田) 일결(一結)에 미(米) 팔(八)되를 거두어 경고(京庫)에 수납(收納)하여 수시(隨時)로 국비(國費)를 지출(支出)하는데 각(各) 사사주인(司私主人)으로 하여금 上供하는 제(諸) 물품(物品)을 수납(收納)케 하고 이 외(外)에는 척포(尺布) 승미(升米)도 민호주(民戶主)로부터 가징(加徵)치 못하게 하여서 사주인私主人 방납계배(防納計倍)의 폐(弊)를 끄치려 함이라 광해군(光海君)은 이 제도(制度)를 경기도(京畿道)에 먼저 시험적(試驗的)으로 행(行)하니 거실(巨室)호민(豪民)과 사주인(私主人)들이 모두 방납(防納)의 대리(大利)를 잃고 백방(百方)으로 저해(沮害)함으로 광해군(光海君)은 여러 번 이 제도(制度)를 파(罷)하려 하였으나 경기(京畿)백성(百姓)들이 일제(一齊)히 그 편리(便利)함을 말하고 파(罷)하지 못하도록 다툰 까닭에 계속(繼續)하여 행(行)하고 그 후(後)에 점차(漸次)로 타도(他道)에 시행(施行)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성질(性質)이 사납고 어두워서 정치(政治)가 몹시 어지럽고 대북파(大北派)를 중용(重用)하여 그 형(兄) 임해군(臨海君) 이하(以下) 동기(同氣)를 많이 죽이고 선조(宣祖) 왕비(王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여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고 폐모(廢母)에 반대(反對)하는 이원익(李元翼)(오리(梧里)) 이항복(李恒福)(필운(弼雲),백사(白沙)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정온(鄭蘊)(호(號) 동계(桐溪))등(等)을 죄(罪)주었다. 이항복(李恒福)이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귀양가는 길에 철령(鐵嶺)에 올라서서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하리」라는 노래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세력(勢力)을 잃고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서인(西人)들이 비밀(秘密)히 반정(反正)할 꾀를 꾸미더니 광해군(光海君) 십년(十年)에 이귀(李貴)(黙齋), 김류(金瑬)(北渚)等이 中心이 되어 반정군(反政軍)을 일으켜서 왕(王)을 강화도(江華島)에 내치고 왕(王)의 조카 능양군(綾陽君)을 맞아드려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인조(仁祖)이다.
임진(壬辰)란(亂)이 끝난 지 이미 이십여년(二十餘年)이라 난후(亂後) 정리(整理)도 채 되지 못한 위에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이 또 십오년(十五年) 동안을 계속(繼續)하니 국가(國家)의 정치(政治)는 말할 수 없이 헝클어지고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은 극도(極度)의 곤궁(困窮)에 빠졌다. 이에 인조(仁祖)는 이원익(李元翼)을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고 난마(亂麻) 같은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하는데 이원익(李元翼)은 대동법(大同法)을 팔도(八道)에 모두 시행(施行)하기를 극력(極力)으로 주장(主將)하였다. 그 때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경기도(京畿道) 이외(以外)에 겨우 충청도(忠淸道)에 시행(施行)하니 백성(百姓)들은 모두 이 법(法)을 대환영(大歡迎)함으로 얼마후(後)에 반대론(反對論)을 물리치고 팔도(八道)에 시행(施行)하였다.
처음에 반정(反正)을 꾀하던 여러 사람들은 오직 국가(國家)와 백성(百姓)을 위(爲)하여 거의(擧義)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반정후(反正後) 공신(功臣)들의 대부분(大部分)은 순전(純全)히 사리(私利)를 위(爲)하여 행동(行動)하고 공신(功臣)이라는 특권(特權)을 이용(利用)하여 모리(牟利) 행위(行爲)를 자행(恣行)함으로 국인(國人)의 비난(非難)이 적지 아니 하였고 김장생(金長生)(사계(沙溪) 같은 이는 공신(功臣)들에게 글을 보내어 반정(反正) 거의(擧義)한 것은 일국(一國)이 칭송(稱誦)하는 일이나 공(功)을 빙자(憑藉)하고 사리(私利)를 도모(圖謀)하면 후세(後世)의 공론(公論)이 이를 무엇이라고 평(評)하랴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