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鮮)
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하나 확실(確實)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그 후(後)에 중국(中國)의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는데, 은(殷)나라의 왕자(王子)인 기자(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지금(只今)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부여(扶餘), 남부(南部)에는 구려맥(句麗貊)이 있고 반도방면(半島方面)에는 한(韓)이 있었는데 그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는 알 수 없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여러모로 발달(發達)된 산업(産業)의 기초(基礎) 위에서 대륙(大陸)의 진보(進步)한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여 크게 발전(發展)하고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발달(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中國)의 제(齊)와 노(魯)로 더불어 무역(貿易)하며 농사(農事)짓는 법(法)과 우마(牛馬)를 기르는 목축업(牧畜業)이 발달(發達)하고 사람의 성질(性質)이 정직(正直)과 예절(禮節)과 신의(信義)를 숭상(崇尙)하고 평화(平和)와 정결(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사람들은 아국인(我國人)을 군자지국(君子之國) 대인지시(大人之市)라하고 인인선(仁人善)이라 불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이 구백여년(九百餘年)동안 계속(繼續)하는 중(中)에 중국(中國)에서는 주(周)나라 세력(勢力)이 차츰 약(弱)해지고 소위(所謂)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時代)라 해서 여러 백년(百年)동안 전쟁(戰爭)이 계속(繼續)되고 흉년(凶年)이 겹들어서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중국(中國) 북방(北方) 사람들이 혹(或)은 해로(海路)로, 혹(或)은 육로(陸路)로 조선(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특(特)히 연(燕)나라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서부(西部)를 쳐서 빼앗고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조선(朝鮮)과 지경(地境)을 접(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교섭(交涉)이 잦았고 주(周)나라가 망(亡)하고 진(秦)나라가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할 무렵에 조선(朝鮮)으로 피난(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수(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기부왕(箕埠王)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서부국경(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만(滿)이 야심(野心)을 품고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난리(亂離)를 일으켜 왕도(王都)를 치거늘 준왕(準王)이 미처 항거(抗拒)치 못하여 해로(海路)로 마한(馬韓)에 주입(走入)하니 이는 단기(檀紀)이천일백사십년(二千一百四十年) 정미(丁未)이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세운 후(後)에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진(秦)나라를 이어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한 한(漢)나라의 세력(勢力)이 커져서 동(東)으로 침입(侵入)하니 위만(衛滿)의 손자(孫子) 우거(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항복(降服)하니 이는 단기(檀紀) 이천이백이십육년(二千二百二十六年) 계유(癸酉)의 일이오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삼대(三代) 팔십칠년(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고지(故地)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四郡)의 위치(位置)와 넓이에 대(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대개(大槪)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동강(大洞江) 기슭임이 확실(確實)하고 진번군(眞番郡)은 황해도(黃海道)와 경기도(京畿道)의 한강(漢江) 이북(以北)이오 임둔군(臨屯郡)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와 강원도(江原道)의 철령(鐵嶺) 이북(以北)이오 현토군(玄菟郡)은 압록강(鴨綠江) 기슭을 중심(中心)으로 한 평안북도(平安北道)와 동가강(佟佳江) 하류지방(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사군(四郡)은 우리 민족(民族)의 맹렬(猛烈)한 반항(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이군(二郡)은 이십육년(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현토군(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해소(解消)되고 낙랑군(樂浪郡)만이 중국(中國) 사람들의 근거지(根據地)로서 반도(半島) 중부(中部)에 사백여년(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아국(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중국(中國)과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함으로 아국(我國)의 중국(中國) 무역(貿易)을 맡아 하였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에 분명(分明)한 토성(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전토(田土)사이에서 낙랑군(樂浪郡)의 유물(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낙랑(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동(東)쪽 평평(平平)한 언덕 위에 수다(數多)한 고분(古墳)이 있고 그 고분(古墳) 속에서 금(金) 옥(玉) 동(銅)으로 만든 거울과 각종(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와편(瓦片) 칠기(漆器) 등(等) 낙랑유물(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고고학상(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조선(朝鮮) 중부(中部)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건국(建國)될 무렵에 지금(只今)의 북만주(北滿洲) 지방(地方)에는 부여족(扶餘族)이 살아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에 힘쓰고 중국(中國)의 진보(進步)된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하였으며 지 방(地 方)이 이천리(二千里)이오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나되며 서(西)로 오환(烏桓) 선고(鮮皐) 등(等)의 인(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과실(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혹(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혹(或)은 죽여야한다 하였다. 부여(扶餘)의 임금은 세습적(世襲的) 추장(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오(烏), 가(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等) 벼슬이 있어 사출도(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각기(各其) 수백호(數百戶)로부터 수천호(數千戶)의 백성(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여(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동해(東海) 방면(方面)에는 옥저(沃沮), 예(濊)가 있고 반도(半島) 남부(南部)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 옥저(沃沮)는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동북(東北)이 좁고 서남(西南)이 넓으며 장(長)이 천리(千里)이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으로는 예(濊)와 잇닿아 있었다. 호수(戶數)는 오천(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부락(部落)마다 수령(首領)이 있어 부락(部落)일을 추려나가고 언어(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같고 성질(性質)이 강직(强直)하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생산(生産)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남북(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한 관계(關係)로 여름이면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약탈(掠奪)함으로 산중(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부락(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예(濊)는 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에서 함경도(咸鏡道)의 남(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라 하고 호수(戶數)가 이만(二萬)이며 사람들이 성질(性質)이 순후(淳厚)하고 염치(廉恥)가 밝으며 도적(盜賊)이 없어서 밤에 문(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의복(衣服)은 다르며 여러 부락(部落)은 산천(山川)의 경계(境界)를 중(重)히 여겨 서로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범(犯)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奴隸)와 우마(牛馬)로써 배상(賠償)하며 기(忌)하는 것이 많아서 가족중(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예(濊)사람들은 마포(麻布)를 짜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농사(農事)의 풍흉(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이 시대(時代)는 일산(一山)의 장(障)과 일수(一水)의 조(阻)가 스스로 한 부락(部落)을 이루어 국가(國家)노릇을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지방(地方)에 이러한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칠십팔국(七十八國)이나 있었다. 각(各) 부락(部落)에는 수령(首領)이 있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각기(各其) 소속(所屬)한 부락국가(部落國家)를 통어(統御)하는 총왕(總王)이 있었다.
마한(馬韓)은 그 중(中) 서(西)쪽에 있어서 백성(百姓)이 농사(農事)를 짓고 양잠(養蠶)을하고 오십사국(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대국(大國)은 만여호(萬餘戶), 소국(小國)은 수백호(數百戶)이며 사람의 성질(性質)이 용감(勇敢)하고 해마다 오월(五月)에 파종(播種)이 끝난 뒤와 시월(十月)에 추수(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전국인(全國人)이 모여 천제사(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일야(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변(弁),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땅에서 모두 이십사국(二十四國)이 있고 대국(大國)은 사오천호(四五千戶)이오 소국(小國)은 육칠(六七)백호(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양잠(養蠶)과 우마(牛馬)의 축산(畜産)이 성(盛)하고 혼인(婚姻)에 예절(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조우(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영혼(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삼한(三韓)을 나눠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하고 그 중(中) 마한(馬韓)이 지금(只今)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에서부터 충남북도(忠南北道)와 전라도(全羅道)땅이고 진한(辰韓)은 지금(只今)의 경상도(慶尙道)의 대부분(大部分)이고 변한(弁韓)은 나중의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지방(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硏究)에 의(依)하면 진한(辰韓)이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漢江) 유역(流域)이고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이고 변한(弁韓)이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이라 한다.
부여(扶餘)의 일족(一族)에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의 땅이오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이다.
이 시대(時代)의 정치(政治)는 신앙(信仰)과 완전(完全)히 분립(分立)되지 아니하여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정치(政治)를 행(行)하였다. 신앙(信仰)의 가장 높은 대상(對象)은 하늘의 상징(象徵)인 태양(太陽)이었으며 해마다 농사(農事)가 끝나면 일정(一定)한 때에 신곡(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등(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제사(祭祀)는 처음에 높은 산(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태양(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風習)은 나중에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되고 강안(江岸)과 평야(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계속(繼續)되어 국가(國家)에서는 해마다 유명(有名)한 높은 산(山)에 산제(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정성(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사회(社會)는 대가(大家)라는 지배계급(支配階級)과 하호(下戶)라는 백성(百姓)과 노예(奴隸)의 세 계급(階級)으로 나뉘었고 대가(大家)들은 광대(廣大)한 토지(土地)를 가지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농사(農事)를 지었으며 이 시대(時代)는 토지(土地)는 넓고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함으로 전쟁(戰爭)할 때마다 노예(奴隸)로 부릴 포로(捕虜)를 얻는 것이 유일(唯一)한 전리품(戰利品)이었다. 산업(産業)은 농잠(農蠶)과 직포(織布)가 자못 발달(發達)하였으며 변 진한(弁辰韓)에서는 철(鐵)을 채굴(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무역(貿易)하였다.
종전(從前)에는 석기(石器)와 동기(銅器)만 있었는데 동기(銅器)는 연(軟)하여 칼 도끼 등(等)으로 사용(使用)치 못하더니 철(鐵)이 발견(發見)된 후(後)로 철제(鐵製)연장과 무기(武器)가 생겨서 산업(産業)과 전쟁(戰爭)양식(樣式)에 대혁명(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문명(文明)에서 철(鐵) 한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호화(豪華)스러운 문명(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고대(古代)의 철(鐵)의 발견(發見)은 참으로 경이적(驚異的) 사실(事實)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