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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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定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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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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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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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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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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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壬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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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己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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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辛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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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己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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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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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癸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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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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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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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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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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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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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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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世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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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睿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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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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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燕山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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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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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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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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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己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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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庚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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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乙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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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丙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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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乙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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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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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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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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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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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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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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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明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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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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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光海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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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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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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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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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丙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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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戊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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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乙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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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癸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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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庚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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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庚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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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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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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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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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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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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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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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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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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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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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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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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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憲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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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乙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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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辛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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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乙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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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丁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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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辛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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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乙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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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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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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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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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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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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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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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哲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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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황제(光武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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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황제(隆熙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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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庚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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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甲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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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丁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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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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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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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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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이조(李朝)건국(建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선조(先祖)는 본시(本是) 함경도(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고조부(高祖父)가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慶興)에 살더니 태조(太祖)의 어버이 이자춘(李子春)은 영흥(永興)에 살고 거기서 태조(太祖)를 낳으니 이때 영흥(永興)은 쌍성총독부(雙城總督府)로 되어 원(元)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칠 때에 이자춘(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공(功)이 있었음으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兼)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함주(咸州)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큰 세력(勢力)을 가졌고 이때 태조(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특출(特出)한 무예(武藝)가 있었음으로 함주(咸州) 이북(以北)에 살고 있는 여진족(女眞族)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으며 후일(後日)에 태조(太祖)가 자주 큰 공(功)을 세운 것도 그 수하(手下)에 동두란(佟豆蘭) 이하(以下) 여진(女眞) 출신(出身)의 맹장(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가 건국(建國)한 이듬해에 국호(國號)를 고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삼년(三年) 후(後)에 도읍(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성(城)을 쌓아서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