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

몽고란 (삼화서당국사)

 

 

몽고란(蒙古亂)
최충헌(崔忠獻)이 권세(權勢)를 잡은 후(後)에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판국(版局)이 벌어졌다. 몽고(蒙古)는 본시(本是) 외몽고(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유목(遊牧)하는 부족(部族)이러니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사방(四方)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쳐서 큰 세력(勢力)을 이루니 이는 최충헌(崔忠獻)이 한창 세도(勢道)를 부리던 희종(熙宗)때 일이다. 금(金)나라가 몽고(蒙古)의 힘에 눌림에 계단(契丹)의 귀족(貴族)들이 요동(遼東)에서 일어나고 금(金)의 반장(叛將) 포선만노(蒲鮮萬奴)는 지금의 간도(間道)지방(地方)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그 후(後) 고종(高宗)때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계단족(契丹族)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우리 나라 지경(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약탈(掠奪)을 함부로 행(行)하였다. 고려(高麗)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각지(各地)에서 계단병(契丹兵)과 싸우는 중(中)에 또 몽고(蒙古)가 동진(東眞)과 연합(聯合)하여 계단병(契丹兵)을 치기 위(爲)하여 그 뒤를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니 국내(國內)에 사국군대(四國軍隊)가 어울려서 형세(形勢)가 극(極)히 험악(險惡)하고 또 급박(急迫)하였다. 더욱이 고려(高麗)와 몽고(蒙古)는 종래(從來)로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전연(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함으로 국내인심(國內人心)이 흉흉(恟恟)하였다.
이때 계단병(契丹兵)은 앞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몽진연합군(蒙眞聯合軍)에계 쫓기어 서북면(西北面)의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몽고(蒙古)장(將) 합진(哈眞)과 동진장(東眞將)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강동성(江東城)을 포위(包圍)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세(形勢)가 심(甚)히 위구(危懼)함을 보고 전략(戰略)과 외교(外交)에 능숙(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조충(趙冲)을 원수(元帥)로 하고 김취려(金就礪)를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몽진군(蒙眞軍)의 영(營)에 가서 크게 주연(酒宴)을 베풀고 두 장수(將帥)를 접대(接待)하였다. 두 장수(將帥)는 우리 나라 두 원수(元帥)의 인격(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모앙(慕仰)함을 마지아니하였다. 완안자연(完顔子淵)은 아인(我人)에게 말하되 고려(高麗)의 조원수(趙元帥)는 기위(奇偉)한 사람이라 국가(國家)가 이러한 장수(將帥)를 둔 것은 천(天)의 사(賜)함이라 하고 합진(哈眞)은 김취려(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육국(六國)을 정벌(征伐)하여 귀인(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형(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기위(奇偉)한고 하여 칭찬(稱讚)하였다. 이에 세나라 군사(軍士)는 강동성(江東城)을 쳐서 계단병(契丹兵)을 전멸(全滅)시킨 뒤 몽진(蒙塵)과 화호(和好)를 맺고 무사(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난(亂)에 귀항(歸降)한 자(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산림지대(山林地帶)와 황무지(荒蕪地)에 이주(移住)시켜 농사(農事)짓게 하니 이를 계단장(契丹場)이라 하고 계단장(契丹場)에 들어간 자(者)들 중(中)에는 농사(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피혁(皮革) 유기(柳器) 등(等) 수공업(手工業)으로 전업(轉業)하는 자(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개(大槪) 후일(後日)의 소위(所謂) 소백정(白丁) 고리백정(白丁)등(等)이 된 것이다.
만주(滿洲) 지방(地方)에서는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밀려나와서 동진국(東眞國)은 얼마후(後)에 망(亡)하고 몽고(蒙古)는 고려(高麗)를 구원(救援)하였다.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에 몽고(蒙古)의 사신(使臣)이 고려(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도적(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몽고(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잡아 가지고 국교(國交)가 점점(漸漸) 험악(險惡)하더니 마침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제일차(第一次)로 고려(高麗)에 쳐들어 왔다. 원래(原來) 만몽(滿蒙) 지방(地方)에 뿌리를 잡은 국가(國家)들은,
一. 해양(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해외(海外)로 발전(發展)할 길이 없고 二. 기후(氣候)가 추워서 잠포(蠶布) 등(等) 의복(衣服) 자료(資料)가 생산(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몽고(蒙古)가 처음으로부터 고려(高麗)를 빼앗을 욕심(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해양(海洋)과 의복(衣服) 자료(資料)를 얻기 위(爲)함이오 계단병(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고려(高麗)에 발을 부칠 구실(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고려(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자기들이 처음부터 욕심(慾心)내던 일을 달성(達成)하기 위(爲)함이다.
금후(今後)에 있어서도 몽고(蒙古)방면(方面)에 입(立)하는 나라는 해안(海岸)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가장 거리(距離)가 가까운 동해(東海)로 진출(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아국(我國) 해안(海岸)에 착목(着目)할 것은 물론(勿論)이다. 몽고군(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구주성(龜州城)을 포위(包圍)하니 이때 구주(龜州)를 지키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 등(等)이 여러 날 동안 몽고군(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몽고장(蒙古將) 한 사람이 탄복(歎服)하여 왈(曰) 내가 종군(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성(城)이 이와 같이 공격(攻擊)을 받고 굴(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성중(城中) 제장(諸將)들은 후일(後日) 반드시 장상(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고려(高麗)는 마침내 몽고군(蒙古軍)을 대적(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삼군(三軍)이 몽고군(蒙古軍)에게 굴복(屈服)하기에 이르렀다. 몽고(蒙古)에서는 달로화적(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관리(官吏) 칠십이인(七十二人)을 보내와서 고려(高麗)의 내정(內政)을 간섭(干涉)하였다. 이에 고려(高麗) 조정(朝廷)은 몽고(蒙古)와 항쟁(抗爭)하려하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왕(王)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니 (단기 삼천오백육십오년) 이는 몽고군(蒙古軍)이 육지(陸地)에서는 강(强)하나 수군(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삼십년(三十年)동안 몽고(蒙古)의 군사(軍士)가 강화도(江華島)의 맞은편(便)에 와서 아무리 위협(威脅)을 하고 출륙(出陸)하기를 계속(繼續)하여도 최우(崔瑀)는 응(應)하지 아니하니 그 분(忿)풀이를 육지(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전후(前後)육차(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압록강(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서북면(西北面)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적군(敵軍)은 멀리 경주(慶州)까지 쳐들어와서 학살(虐殺)과 노략(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있는 대장경(大藏經)판(版)과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의 구층석탑(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제육차(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고려(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이십만명(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수(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려(高麗)에서는 대장경(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고종왕(高宗王)은 다시 발원(發願)하여 십육년(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판(版)을 새기고 이 대장경(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간편(簡便)한 방법(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활자(活字)이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삼천육백육십칠년)에 이미 주자(鑄字)로써 책(冊)을 박아내니 이는 독일(獨逸)사람들이 서양(西洋)에서 처음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서 책(冊)을 박아낸 것보다 이백년(二百年)이나 앞섰다. 활자(活字)는 문명(文明)의 모(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세계(世界)에서 가장 먼저 활자(活字)를 발명(發明)한 고려(高麗)는 역시(亦是) 문화(文化)의 선진국(先進國)이었다.
송(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귀중(貴重)한 책(冊)을 빌려달라 하고 일본(日本)이 항상(恒常) 남양(南洋)의 진기(珍奇)한 물건(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특(特)히 대장경(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高麗)가 당시(當時)의 동양(東洋)에서 문화적(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문화(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활자(活字)이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간 뒤 최씨(崔氏)는 정권(政權)을 오로지 하여 사병(私兵)인 삼별초군(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수비(守備)하여 육지(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육지군대(陸地軍隊)에 대(對)하여 항전(抗戰)을 명령(命令)할 뿐이며 서남안지방(西南岸地方)으로부터 수로(水路)로 식량(食糧)과 기타(其他) 물자(物資)를 운수(運輸)해다 안락(安樂)한 생활(生活)을 계속(繼續)하였다.
고종(高宗) 사십오년(四十五年)에 최씨(崔氏)와 삼별초군(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이용(利用)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시켜서 최씨(崔氏)를 멸(滅)하니 최씨(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몽고(蒙古)에 굴복(屈服)하고 왕자(王子)를 보내어 화친(和親)하기를 청(請)하니 원(元)나라(몽고(蒙古))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왈(曰)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라 당태종(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왕자(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후(厚)히 접대(接待)하고 군사(軍士)로 호위(扈衛)시켜서 본국(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고종(高宗)이 승하(昇遐)하고 왕자(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원종(元宗)이다. 원종(元宗)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정리(整理)하는 가장 복잡(複雜)한 때라 첫째로 삼십년(三十年)동안 도읍(都邑)하던 임시수도(臨時首都)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송경(松京)에 환도(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환도(還都)한 뒤 삼별초(三別抄)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내려가서 관군(官軍)과 싸우다가 패(敗)하여 다시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관군(官軍)에게 망(亡)하였다.
이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대(對)하여 지금의 어떤 학자(學者)는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으로써 몽고(蒙古)에 항전(抗戰)하는 의거(義擧)라 하여 찬양(讚揚)하고 있으나 삼별초(三別抄)는 원래(元來) 최씨(崔氏)의 수족(手足)으로써 몽고란(蒙古亂)중 가장 안락(安樂)한 도중(島中)생활(生活)을 하고 항적(抗敵)의 진(陣)에 참가(參加)한 일리 없고 최씨(崔氏)가 망한 뒤에 여전(如前)히 강화도(江華島)에 있어 육지(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항전파(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물론(勿論)이오 환도후(還都後)에 그 조직(組織)을 고쳐서 관군(官軍)으로 개편(改編)하려하매 그들은 과거(過去)의 특수(特殊)존재(存在)로서의 특권(特權)이 상실(喪失)됨에 불만(不滿)을 품고 반란(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동북면(東北面)의 쌍역(雙域)에 있는 관리(官吏)들이 본국(本國)을 배반(背叛)하고 화주(和州 永興) 이북(以北)의 땅으로써 원(元)나라에 부속(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元)나라가 고려(高麗)의 종주국(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가 일본(日本)을 칠 터이니 고려(高麗)도 힘을 합(合)하라 하여 충렬왕(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단기 삼천육백칠년) 고려(高麗)에서 만든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으로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무찌르고 구주(九州)의 박다(博多)를 점령(占領)하였으나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서 전함(戰艦)이 많이 파손(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후(後) 칠년(七年)만에 다시 몽고군(蒙古軍)과 중국(中國)의 강남군(江南軍)과 고려군(高麗軍)이 연합(聯合)하여 일본(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강남군(江南軍)이 거의 전멸(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중국(中國)의 전함(戰艦)은 대개(大槪) 파손(破損)되었으나 고려(高麗) 전함(戰艦)의 파손(破損) 된 것이 극(極)히 적은 것은 백제시대(百濟時代) 이래(以來) 아국(我國)의 조선기술(造船技術)이 우수(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高麗)는 백여년(百餘年)동안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정치(政治)는 전(專)혀 원(元)나라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행(行)하여졌다. 충렬왕(忠烈王)이후(以後)로는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원(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공주(公主)가 낳은 아들이 왕위(王位)에 오르게되니 고려(高麗)왕실(王室)은 혈통적(血統的)으로도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시호(諡號)는 종전(從前)의 종자(宗字)를 폐(廢)하고 그 머리에 충자(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별저(別邸)를 두고 거기 내왕(來往)이 잦으니 그 비용(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국가(國家)재정(財政)이 극(極)히 곤란(困難)하였지만 정치(政治)의 명령계통(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본국(本國)에서 발(發)한 명령(命令)이 원(元)나라 대도(大都)로부터 저지(沮止) 당(當)하는 일도 있고 원(元)나라에 아부(阿附)하여 권세(權勢)를 얻으려 하여 본국(本國)을 무함(誣陷)하는 폐주견(吠主犬)들이 양국(兩國)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정부(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정령(政令)을 발(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기강(紀綱)이 여지(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폐주견(吠主犬)들은 심지어(甚至於) 본국(本國)의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원(元)나라의 일지방(一地方)으로 만들자는 운동(運動)까지 일어나니 충선왕(忠宣王)은 체읍(涕泣)하면서 사백년(四百年)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통심(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이제현(李濟賢) 등(等)으로 더불어 원(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원(元)나라 풍습(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한편(便)으로는 문화(文化)의 수입(輸入)도 활발(活潑)하여 안향(安珦)이 孔子의 도상(圖像)과 유교의식(儒敎儀式)을 중국(中國)으로부터 직접(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충선왕(忠宣王)은 원(元)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이루고 조맹부(趙孟頫)등(等) 대학자(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대륙(大陸)문화(文化)의 중심(中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