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

건설시기 (삼화서당국사)

 

 

건설(建設)시기(時機)

태종(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개국(開國)한지 구년(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점차(漸次)로 건설적(建設的) 정책(政策)을 행(行)하게 되었다.
경제면(經濟面)에서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이래(以來)로 화폐제도(貨幣制度)를 여러 번 확립(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태종(太宗)이 다시 착수(着手)하여 전화(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원료(原料)되는 동(銅)이 부족(不足)함으로 주(主)로 저폐(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지폐(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당시(當時) 사람들이 저화(楮貨)를 신용(信用)할 이유(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저폐(楮幣)의 가치(價値)가 폭락(暴落)하더니 마침내 유통(流通)이 끊어지고 전일(前日)과 같이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쓰고 오승포(五升布)를 표준(標準)으로 하니 오승포(五升布)라 함은 일정(一定)하여있는 포폭(布幅)에 경사(經絲) 사백본(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십(十) 오리 일(一)승(升)은 팔(八)목)
문화(文化) 면(面)에 있어서 특기(特記)할만한 것은 주자소(鑄字所) 설치(設置)이다. 고려(高麗)때에 활자(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규모(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태종(太宗) 삼년(三年)에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이직(李稷) 박석명(朴錫命) 등(等)으로 하여금 동(銅)으로 많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주요(主要)한 서적(書籍)을 인쇄(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 상(上) 획기적(劃期的) 혁명(革命)이다.
외교(外交)에 있어서는 태조(太祖)개국(開國)할 때에 명(明)나라의 승인(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명(明)나라의 세폐(歲幣) 요구(要求)가 수량(數量)이 많고 또 가혹(苛酷)하여 특(特)히 마필(馬匹)의 요구(要求)가 더욱 심(甚)하여 매년(每年) 수천필(數千匹) 내지 만여필(萬餘匹)을 강요(强要)하고 또 축우(畜牛)까지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여기에 응(應)하면 국내(國內)의 마필(馬匹)이 전부(全部) 없어질 것이오 응(應)하지 아니하면 명(明)나라로부터 어떠한 압박(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진퇴(進退) 양난(兩難)에 빠졌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를 거절(拒絶)하자고 주장(主張)한 강경(强硬) 논(論)도 있었으나 태종(太宗)은 온화(穩話)하게 이를 해결(解決)하자고 무마(撫摩)하고 명(明)나라에 대(對)하여 세폐(歲幣)를 감(減)할 것을 여러 차례로 요청(要請)하더니 얼마후(後)에 그 요청(要請)대로 실현(實現)되었다.
고려(高麗)말(末)에 극성(極盛)하던 왜구(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태종(太宗)때에 남해안(南海岸)을 침범(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태종(太宗)이 위(位)를 세종(世宗)에게 전(傳)하고 대상왕(大上王)이 되었으니 자기(自己) 생전(生前)에 왜구(倭寇)의 소굴(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상당(相當)한 전과(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수비(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회군(回軍)하였다. (이종무(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太宗)의 장자(長子)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았으나 삼자(三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항상(恒常) 장차(將次)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할 생각이 있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또한 천자(天資)가 척당(倜儻)하여 자기(自己)보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의 재덕(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왕위(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방탕(放蕩)하여 세자(世子)의 위(位)에서 물러나니 이씨(李氏) 개국(開國)이후 추악(醜惡)한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특이(特異)한 행동(行動)을 한 것은 일신(一身)의 영예(榮譽)보다 국가(國家) 전체(全體)를 위하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왕위(王位)를 상양(相讓)하던 혼후(渾厚)한 풍(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王)이되니 이가 세종(世宗)이라 세종(世宗)은 이조(李朝)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제일(第一)가는 성군(聖君)일 뿐만 아니라 아국(我國)의 역사(歷史) 전체(全體)를 통(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인군(人君)이다.
세종(世宗)은 황희(黃憙) 허조(許稠) 등(等) 명상(名相)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함에 그 중점(重點)을 인재(人才) 문제(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인재(人才)를 많이 배양(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人才)를 거용(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군왕(君王)이나 재상(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인재(人才)를 얻어서 국가(國家)의 각 기관(機關)에 적재적소(適材適所)로 배치(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과거(科擧)로써 인재(人才)를 취(取)하는데 그 출제(出題)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국방(國防) 문화(文化) 등(等)에 관(關)한 실제(實際) 방책(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급제(及第)한 사람은 다시 호당(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연구(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인재(人才)가 배출(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사업(事業)을 행(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서변(西邊)과 북변(北邊)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居住)하고 있는데 국인(國人)들은 이를 야인(野人)이라 불렀다.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한 뒤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이남(以南)의 여진족(女眞族)이 한때 모두 귀부(歸附)하였으나 이는 일시적(一時的)의 일이오 그 지대(地帶)가 우리 나라의 영토(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야인(野人)은 항상(恒常) 서북(西北) 변(邊)의 근심이 되더니 세종(世宗)은 이를 정벌(征伐)하기로 결의(決意)하고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북변(北邊)을 치게 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유한(有限)한 인력(人力)으로써 성공(成功)할 수 없는 군역(軍役)을 시작(始作)한다하여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야인(野人)을 쳐서 혹(或)은 항복(降服)받고 혹(或)은 두만강(豆滿江) 외(外)로 쫓아내고 두만강(豆滿江) 남(南)에 종성(鍾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경흥(慶興) 은성(穩城) 부령(富寧)의 육진(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경상도(慶尙道) 백성(百姓)을 옮겨서 그 지방(地方)을 채우니 발해(渤海)가 망(亡)한지 오백여년(五百餘年)에 이 지대(地帶)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돌아왔으며 귀순(歸順)한 야인(野人)들은 혹(或)은 우리 나라 사람에 동화(同化)하고 혹(或)은 재가승(在家僧)이라는 특수인(特殊人)으로서 그 지방(地方)에 남았었다.
(함경(咸鏡)지명(地名)에 흥(興) 자(字)가 셋이 있는 것은 태조(太祖)의 고조부(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경흥(慶興)이라 하고 정종(定宗) 태종(太宗)의 출생지(出生地)를 함흥(咸興)이라 하고 영흥(永興)은 태조(太祖)가 낫기 때문에 영흥(永興)이라고 지명(地名)을 각각 지었다. 신흥(新興)은 왜정(倭政)때 새로 지은 지명(地名))
세종(世宗)이 조세제도(租稅制度)에 대(對)하여는 칠팔년(七八年)을 고민(苦悶)하고 드디어 투표제도(投票制度)를 실시(實施)하였다.
서변(西邊)에서는 파저강(婆豬江) 기슭에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等)이 웅거(雄據)하여 자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약탈(掠奪)함으로 태종(太宗)때에 갑산(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평안도(平安道)에 여연군(閭延郡)을 두었다. 세종(世宗)때에 이르러 야인(野人)의 침입(侵入)이 잦아서 강안(江岸)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들이 안주(安住)할 수 없으니 세종(世宗)은 이를 다만 방비(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강(江)을 건너서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부실 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강(江)건너는 명(明)나라의 영토(領土)이오 또 임목(林木)이 폐문(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명(明)나라에 대(對)하던 외교(外交)로써 야인(野人)정벌(征伐)의 부득이(不得已)함을 역설(力說)하고 한편(便)으로는 비밀(秘密)히 북벌군(北伐軍)을 훈련(訓練)하고 강변(江邊)에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매일(每日) 이 문제(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만일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깨지 않으면 서변(西邊) 일대(一帶)는 야인(野人)의 독무대(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실행(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명(明)나라 영토(領土)에 공공연(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비밀리(秘密裏)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만일 명(明)나라에 들리면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처리(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반대(反對)하는 자(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연일(連日)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대노(大怒)하여 왈(曰) 야인(野人)의 침략(侵略)을 그대로 방임(放任)하자는 것은 국토(國土)를 적(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외교관계(外交關係)에 관(關)한 일을 공공연(公公然)하게 떠들면 국가(國家) 장래(將來)에 무슨 이익(利益)이 있느냐 하여 책(責)하고 아국(我國) 인성(人性)이 경조(輕躁)하여 반드시 국가(國家) 대사(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탄식(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야인(野人)을 치고 강(江) 이쪽에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세곳을 두니 이로써 압록강(鴨綠江) 기슭에 사군(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후(後) 다소(多少)의 곡절(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압록강(鴨綠江)이 완전(完全)히 우리 나라의 국경(國境)이 되었다.
토지(土地)의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고제(古制)에 의(依)하여 수확량(收穫量)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토지(土地)마다 매년(每年) 일정(一定)한 액수(額數)를 받는 공법(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년년(年年)의 풍흉(豊凶)과 작황(作況)의 양부(良否)를 실지(實地)로 답사(踏査)하여 세액(稅額)을 정(定)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일대(一大) 송안(訟案)이 되었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노력(努力)을 들이면 수확(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수한재(水旱災)가 적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공법(貢法)을 환영(歡迎)하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고 기후(氣候)의 영향(影響)을 많이 받아서 흉년(凶年)이 잦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답험법(踏驗法)을 환영(歡迎)하였다. 그리하여 공법(貢法)도 써보고 답험법(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공법(貢法)에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을 정(定)하는 일이나 답험법(踏驗法)에서 매년(每年)의 수확량(收穫量)을 정(定)하는 일이나 모두 실제(實際)로 간사(幹事)하는 관리(官吏)의 공정(公正)여부(與否)가 법(法)의 정신(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세제(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확정(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세종(世宗)은 각도(各道)를 단위(單位)로 하여 각 수령(守令)과 농가(農家)로 하여금 어느 제도(制度)를 찬성(贊成)하는가를 낙점(落點)케 하니 낙점(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투표(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결과(結果)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의 삼도(三道)는 공법(貢法) 찬성(贊成) 자(者)가 십(十)의 팔(八)이오 경기(京畿) 강원(江原)의 양도(兩道)는 양법(兩法)의 찬성(贊成)이 대략(大略) 반반(半半)이었다. 이에 민의(民意)를 존중(尊重)히 여겨 삼남(三南)과 경기(京畿) 강원(江原)은 공법(貢法)을 쓰고 서북(西北) 삼도(三道)는 답험법(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공법(貢法)을 쓰는 지대(地帶)에서도 토지(土地) 등급(等級)이 낮은 박토(薄土)에 대(對)하여는 재(災)를 주기로 하였다. 동일(同一)한 국내(國內)에서 지방(地方)에 따라서 상이(相異)한 법(法)을 쓴 것은 오직 민정(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오백여년(五百餘年) 전(前)옛날에 민의(民意)를 묻기 위(爲)하여 대중(大衆)의 낙점제(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일대(一大) 기관(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토지제도(土地制度)에 결부제(結負制)를 편용(偏用)한 것은 제도(制度)의 문란(紊亂)을 발생(發生)시킨 일인(一因)이 되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에는 면적(面積)을 표시(表示)하는 경무제(頃畝制)와 수확량(收穫量)을 표시(表示)하는 결부제(結負制)를 병용(竝用)하니 일결(一結)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부(負)가되고 일부(一負)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이 일속(一束)이 되었다. (결(結)은 맥, 부(負)는 짐, 속(束)은 뭇)
경(頃)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일등지(一等地)의 일결(一結)과 동일(同一)한 면적(面積)이오 경(頃)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무(畝)가된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양제(兩制)를 병용(竝用)하다가 그 후(後)에 세액계산(稅額計算)의 편의(便宜)를 위(爲)하여 결부법(結付法)을 전용(專用)하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이를 답습(踏襲)하였다. 세종(世宗)때에 토지(土地)를 구등(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결부(結負)와 경(頃)으로써 비교(比較)하여보면 일등지(一等地) 일결(一結)은 일경(一頃)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하나 구등지(九等地) 일결(一結)은 사경(四頃) 여(餘)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함으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에 따라서 경수(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토지(土地)를 보고 그 결수(結數)를 알 수 없으며 혹(或)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농민(農民)의 토지(土地)를 침범(侵犯)하되 국가(國家)의 토지장부(土地帳簿)에는 결 부 수(結負數)만 있고 그 토지(土地)의 지도(地圖)라든가 면적(面積)이든가가 기재(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침점(侵占)여부(與否)와 침범(侵犯)한 면적(面積)을 가고(可考)할 길이 전연(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각(各) 토지(土地)의 세액(稅額)이 헝클어지기 시작(始作)하였다. (세종(世宗)이 면적(面積)을 재기 위(爲)하여 인재(人才)를 구(求)하니 인재(人才)가 없어서 면적(面積)을 재지 못하여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였다.)
세종(世宗)은 천성(天性)이 총명(聰明)하고 또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궁중(宮中)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학자(學者)들을 모아서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는 한편 유익(有益)한 서적(書籍)을 많이 만드니 고려사(高麗史)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농사설(農事說)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음악(音樂)에도 많은 관심(關心)을 가져서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며,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악기(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구악(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세계(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 나라의 아악(雅樂)은 이때에 완성(完成)한 것이다. 또 역상(曆象) 방면(方面)에도 연구(硏究)를 쌓아서 장영실(蔣英實)과 더불어 대소(大小)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귀(仰釜日晷) 등(等)을 만들고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각도(各道)에 나눠주어서 우량(雨量)을 재었다. 이는 서기(西紀)1639년(年)보다. 이백년(二百年)이 앞서서 활자(活字)와 함께 우리 문화(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문화사(文化史)상(上) 가장 특기(特記)할만한 사업(事業)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국문(國文)의 창제(創製)이다.
세종(世宗)은 「제국(諸國)이 각기(各其) 문자(文字)가 있어서 방언(方言)을 기(記)하거늘 독(獨)히 무(無)하노라 아국(我國)의 어음(語音)이 중국(中國)과 달라서 한자(漢字)와 서로 유통(流通)치 못함으로 우민(愚民)이 언(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정(情)을 신(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민망(憫惘)히 여겨 문자(文字)를 신제(新製)하야 인인(人人)으로 하여금 학습(學習)하기 쉽고 일용(日用)에 편(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국가의식(國家意識)의 자각(自覺)과 대중교육(大衆敎育)의 필요(必要)에 의(依)하여 국문(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등(等)과 더불어 친(親)히 연구(硏究)를 거듭한 결과 그의 이십팔년(二十八年) (삼천칠백칠십구년 병인(丙寅))에 이십팔자(二十八字)를 지어내어 중외(中外)에 영포(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세계(世界)의 여러 문자(文字)중에서 제일(第一) 우수(優秀)한 우리 국문(國文)이다.
이때 한학사상(漢學思想)에 젖은 최만리(崔萬里)같은 무리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반대(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세종(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관청(官廳)의 공문서(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을 번역(飜譯)하여 백성(百姓)들에게 읽혔다. 민간(民間)에서는 이 글을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라하고 한문(漢文)을 번역(飜譯)한 것을 언해(諺解)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