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2.

임오군란 갑신정변 (삼화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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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오랜 동안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깨트리고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허(許)한 우리 나라는 비로소 세계(世界)의 정세(情勢)에 눈뜨게 되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 신사(辛巳)에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等) 십수인(十數人)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 하여 일본(日本)으로 보내어 개화(開化)의 정무(政務)를 시찰(視察)케 하니 이는 우리 나라가 서양(西洋)의 신문명(新文明)에 대(對)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관심(關心)을 표시(表示)한 시초(始初)이었다.
신사단(紳士團)이 돌아와서 임오년(壬午年)에 통리기무위문(統理機務衛門)이라는 기관(機關)을 만들어서 정치(政治)를 시행(施行)하며 또 병제(兵制)를 고치고 일본(日本) 육군(陸軍) 장교(將校)를 데려다가 신식(新式)의 군대(軍隊)를 편성(編成)하였다.
이와 동시(同時)에 모든 방면(方面)에 신구(新舊)의 대립(對立)이 생겨서 서로 비난(非難)과 공격(攻擊)을 일삼게 되니 신문화(新文化)를 받아들이자는 자(者)는 개화파(開化派)라 하고 일본(日本)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수구파(守舊派)라 지목(指目)하였는데 이들은 세계열강(世界列强)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 나라의 새 지위(地位)를 자각(自覺)하여 국민일치(國民一致)로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기초(基礎)를 닦는다는 것보다 개화파(開化派)는 일본(日本)을 힘입으려 하고 수구파(守舊派)는 청국(淸國)을 기대려하여 양자(兩者)가 모두 제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는 점(點)으로는 매 한가지오 다른 것이 없었고 이로 인(因)하여 우리 나라는 청국(淸國)과 일본(日本)이 동양(東洋)에서의 지위(地位)를 다투는 씨름판이 되었다.
군제개혁(軍制改革)과 일본(日本) 세력(勢力)의 도입(導入)은 수구파(守舊派)의 싫어 하는 바이오 또 구식(舊式) 군인(軍人)은 실직(失職)될 것을 걱정하고 있더니 임오년(壬午年)에 구식(舊式) 군인(軍人)이 오랫동안 요미(料米)를 받지 못하고 또 밀렸던 요미(料米)를 타는데 쌀에 모래가 많이 섞여서 이에 불평(不平)이 폭발(暴發)하여 한편(便)으로 퇴처(退處)하여 있는 대원군(大院君)에게 진정(陳情)을 하고 한편(便)으로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탐학(貪虐) 불법(不法)으로 민렴(民斂)을 한 민씨(閔氏)를 죽이고 위해(危害)가 민비(閔妃)에게 미칠듯 함에 민비(閔妃)는 충주(忠州)로 도망(逃亡)하고 한편(便)으로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을 습격(襲擊)하고 또 교사(敎師)로 와 있던 일본(日本)장교(將校)를 죽이니 일본공사(日本公使)는 스스로 사관(使舘)에 불지르고 인천(仁川)으로 가서 영국(英國) 군함(軍艦)을 얻어 타고 본국(本國)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이 이 변보(變報)를 듣고 나와서 난(亂)을 진정(鎭定)하고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민씨(閔氏)들은 구원(救援)을 청국(淸國)에 청(請)하매 청국(淸國)에서는 이 기회(機會)를 타서 우리 나라에 세력(勢力)을 뻗치려 하여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병(兵)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서울로 와있게 하고 대원군(大院君)이 이번 변란(變亂)이 장본인(張本人)이라 하여 억지로 청국(淸國)으로 데려가더니 얼마후(後)에 돌려보냈다. 화방(花房)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인천(仁川)으로 와서 변란(變亂)의 책임(責任)을 물으니 조정(朝廷)에서는 배상금(賠償金) 오십만원(五十萬圓)을 내고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에 호위병(護衛兵)을 두고 사신(使臣)을 일본(日本)에 보내어 진사(陳謝)의 뜻을 표(表)하는 등(等) 조건(條件)으로 조약(條約)을 맺으니 이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오 이해 팔월(八月)에 박영효(朴英孝)를 대사(大使)로 하고 김옥균(金玉均)을 부사(副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이때의 승선(乘船)에 처음으로 태극기(太極旗)를 사용(使用)하였다.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 등(等)이 일본(日本)에 가서 보고는 우리 나라 정치(政治) 개화(開化)의 시급(時急)함을 깨닫고 돌아와서 위선(爲先) 전환국(典圜局)(주전소(鑄錢所)) 기기국(機器局)(제조소(製造所)) 박문국(博文局)(인쇄소(印刷所))등(等)을 설치(設置)하고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發刊)하여 민지(民志)의 계개발(啓開發)에 힘쓰고 국정(國政) 개혁(改革)에 대(對)하여 여러 가지 포부(抱負)를 발표(發表)하니 이가 우리 나라 최초(最初)의 신문(新聞)이었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갑신(甲申)에 청국(淸國)은 불국(佛國)과의 사이에 분쟁(紛爭)이 있었다. 그럼으로 다른 일을 돌아볼 여력(餘力)이 없는지라 개화파(開化派)에서는 이를 알고 일본(日本)의 후원(後援)을 얻어 수구파(守舊派)를 소탕(掃蕩)하여버릴 계획(計劃)을 세우고 그해 시월(十月)에 신설(新設)한 우정국(郵政局)의 개청식(開廳式)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민씨(閔氏) 일당(一黨)의 여러 요인(要人)을 죽이고 일병(日兵)을 궁중(宮中)으로 끌어들여 왕(王)을 족쳐서 개화파(開化派)의 신정부(新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가 청국(淸國) 군사(軍士)를 청병(淸兵)함에 청장(淸將) 원세개(袁世凱)가 군사(軍士)를 이끌고 들어가서 일군(日軍)과 접전(接戰)하였다. 일병(日兵)이 힘이 약(弱)하여 궁중(宮中)에서 패퇴(敗退)하고 홍영식(洪英植) 등(等)은 죽고 일본공사(日本公使) 등(等)은 분격(憤激)한 민중(民衆)의 습격(襲擊)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퇴거(退去)하고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등(等)은 이틈에 끼어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그 즉시(卽時)로 민씨(閔氏) 수구파(守舊派)의 정국(政局)이 다시 나타나니 이것이 갑신(甲申) 시월(十月)의 변(變)이라는 것이오 개화파(開化派)의 실패(失敗)는 내 집안 일을 남의 힘으로만 하려 한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이오 그 까닭에 우리 나라의 개화(開化)가 시운(時運)에 뒤진 것은 천재(千載)의 한사(恨事)이었다.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일본(日本)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 정상성(井上聲)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담변(談辨)하여 우리가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의 신축(新築)할 기지(基地)와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는 조건(條件)으로 그 전(前) 일을 결말(結末) 짓고 한편(便) 일본(日本)은 다음해 을유(乙酉)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청국(淸國)에 보내어 이홍장(李鴻章)으로 더불어 천진(天津)에서 담변(談辨)하여 양국(兩國)의 조선(朝鮮) 주둔(駐屯) 병(兵)을 사개월(四個月) 이내(以內)로 철수(撤收)할 것과 앞으로 조선(朝鮮) 사변(事變)에 있어 양국(兩國)이 군대(軍隊)를 출동(出動) 시킬 때에는 서로 통지(通知)할 것을 약정(約定)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천진조약(天津條約)이오 이 갑신(甲申)의 변(變)은 여러 해 동안 속으로 갈등(葛藤)되는 청(淸) 일(日) 양국(兩國)의 세력(勢力)이 표면(表面)에서 충돌(衝突)한 것이다.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의(依)하여 양국(兩國)이 모두 철병(撤兵)하였으나 청병(淸兵)의 一將 원세개(袁世凱)가 통상사무(通商事務) 전권위원(全權委員)의 명목(名目)으로써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고 제민(諸閔)이 그와 어우러져서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행(行)하여 국사(國事)가 더욱 글러졌다. 다만 시세(時勢)의 추이(推移)하는 바에 개화(開化)에 관(關)한 신시설(新施設)이 철종(哲宗)때에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세도(勢道)하여 함부로 관직(官職)을 팔아먹고 이 관직(官職)을 산 무리들이 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와서 토색(討索)을 마음껏 하고 양반계급(兩班階級)이 서원(書院)을 소굴(巢窟)로 하여 백성(百姓)들을 괴롭게 함으로 각지(各地)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민심(民心)이 불안(不安)한 중(中) 경주(慶州)의 최제우(崔濟愚)(水雲)가 東學이란 새 宗敎를 일으켜서 「輔國安民 廣濟蒼生」을 敎의 主旨로하니 塗炭에 빠진 百姓들이 많이 加入하였다. 政府에서는 특권계급(特權階級)에 불평(不平)을 품은 하층계급(下層階級)의 사람들이 한 당(黨)으로 단결(團結)됨을 두려워하여 동학(東學)이 세상(世上)을 어지럽히고 민중(民衆)을 속인다는 죄명(罪名)으로 최제우(崔濟愚)를 잡아다 大邱에서 死刑하니 敎徒들은 地下로 들어가서 東學運動을 繼續하였다. 비정(秕政)에 시달리는 백성(百姓)들은 마음이 많이 이에 기우러져서 은연(隱然)히 천세력(天勢力)을 형성(形成)하더니 임진(壬辰)에 이르러 최시형(崔時亨)(해월(海月))을 중심으로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이 표면화(表面化)하여 정부(政府)에 글을 올리고 계사년(癸巳年)에는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을 중심(中心)으로 굳게 단결(團結)한 교도(敎徒)들이 경성(京城)에 올라와서 대궐(大闕) 앞에서 탄원(歎願)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시위운동(示威運動)을 감행(敢行)하였다. 이때에는 정부(政府)의 해산명령(解散命令)으로 일단(一旦) 물러났으나 한편(便) 불안(不安)한 민심(民心)을 자극(刺戟)하고 한편(便)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의 삼남(三南)을 비롯하여 강원(江原) 황해(黃海) 평안도(平安道)에 이르기까지 동학(東學)의 운동(運動)이 급속도(急速度)로 발전(發展)하였다
이때 전라도(全羅道) 고부(古阜) 군수(郡守)가 만석보(萬石洑)(정읍)를 수리(修理)함에 있어 부정(不正)한 일이 있었음으로 민란(民亂)이 일어나더니 동학당원(東學黨員) 전봉준(全琫準)이 이를 계기(契機)로 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난리(亂離)를 일으켜서 사방(四方)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났다. 관군(官軍)이 이를 치러 갔으나 도처(到處)에서 패(敗)하고 마침내 전주(全州)가 동학당(東學黨)에게 점령(占領)되었음으로 조정(朝廷)에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상의(相議)한 결과(結果) 청국(淸國) 군사(軍士) 일천오백명이 와서 군사(軍士)를 도와서 겨우 난(亂)을 평정(平定)하였다. 일본(日本)은 벌써부터 한번 청국(淸國)과 싸워 대륙(大陸)에 있는 지위(地位)를 결정(決定)해 보려고 벼르는 차이라 갑오(甲午) 이월(二月)에 일본(日本)의 보호하(保護下)에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상해(上海)에 갔다가 조선(朝鮮)사람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국론(國論)이 일어나고 인(因)하여 청국(淸國)이 동학란(東學亂)에 일본(日本)에 통고(通告)함이 없이 조선(朝鮮)에 출병(出兵)함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위반(違反)함이라 하여 또한 유민(留民)을 보호(保護)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출병(出兵)하더니 이해 유월(六月)에 마침내 아산(牙山) 해상(海上)에서 양국(兩國)의 해군(海軍)이 충돌(衝突)하고 성환(成歡)에서 육전(陸戰)이 시작(始作)하였다. 전쟁(戰爭)이 난 뒤에 수륙(水陸) 양쪽에서 청국(淸國)이 대패(大敗)하여 일본(日本)의 지위(地位)는 나날이 강(强)하여 졌다.
일본(日本)이 세력(勢力)의 커짐을 따라 우리 나라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기 시작(始作)하고 개화당(開化黨)이 세(勢)를 얻어 민씨(閔氏) 일족(一族)을 물리치고 김홍집(金弘集)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신정부(新政府)가 조직(組織)되고 청국(淸國)과의 관계(關係)를 끊고 개국기원(開國紀元) 준용과거(遵用科擧) 폐지(廢止) 계급타파(階級打破) 사회혁신(社會革新) 등(等)에 관(關)한 이백여건(二百餘件)을 결정(決定)하니 이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우리 나라의 천수백년(千數百年)동안을 내려오던 봉건적제도(封建的制度)를 종결(終決)시키고 서양(西洋)의 자본주의(資本主義)를 수입(輸入)하는 시초(始初)이며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이를 강요(强要)한 것은 우리 나라의 발전(發展)을 위(爲)함이 아니오 일본(日本) 자본주의(資本主義)의 한 시장(市場)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을미년(乙未年)에 일본(日本)과 청국(淸國)이 마관조약(馬關條約)을 맺고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밝히고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일본(日本)에 주기로 하더니 아라사(俄羅斯)와 독일(獨逸)과 불란서(佛蘭西)의 삼국(三國)이 일본(日本)을 눌러서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청국(淸國)에 돌려주기로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의 힘이 약(弱)함을 보고 또 주권(主權)의 침해(侵害)와 이권(利權)의 강요(强要)가 심(甚)해 짐으로 조정(朝廷)과 국민(國民)들에 배일(排日)의 기운(氣運)이 움직이고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제(壓制)로 된 경장(更張)도 좋을 수가 없다하여 잘 시행(施行)되지 아니 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는 문벌타파(門閥打破)의 칙유(勅諭)가 내려서 양반(兩班)도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할 수 있고 또 상업(商業)이나 공업(工業)을 하던 사람도 학교(學敎)에 입학(入學)할 수 있다 하니 이는 사민평등(四民平等)(士農工商)의 첫 걸음을 내 디딘 것이며 이러한 정신(精神) 아래 을유년(乙酉年)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서 신학문(新學問)과 신사상(新思想)을 가르치고 이해에 또 濟象院을 設立하여 처음으로 西洋의 의술(醫術)을 받아 들였다. 이 보다 앞서 갑신년(甲申年)에 우정국(郵政局)을 설립(設立)하고 우체제도(郵遞制度)를 실시(實施)하려던 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因)하여 일시(一時) 중단(中斷)되더니 을유년(乙酉年)에 전보국(電報局)이 생기고 이와 전후(前後)하여 주요(主要) 도시(都市)에 전신선(電信線)이 가설(架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