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2.

일본의 침략 (삼화서당국사)

 

일본(日本)의 침략(侵略)
우리 나라에 배일(排日)의 소리가 높아짐에 종전(從前)부터 동양(東洋) 방면(方面)에 세력(勢力)을 뻗쳐보려고 항상(恒常)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아라사(俄羅斯)가 공사(公使) 위패(韋貝)(카를 베베르)를 우리 나라에 보내어 왕실(王室)에 친근(親近)하기를 힘쓰고 일본(日本)을 누름에는 아국(俄國)이 가장 적당(適當)함을 선전(宣傳)하여 새로이 궁정(宮廷)의 신뢰(信賴)를 받게되고 개화당(開化黨)은 점차(漸次)로 몰락(沒落)하였다. 이때 일본(日本)의 공사(公使)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는 무인(武人)이라 이를 개(慨)하여 국면(局面)의 비상타개(非常打開)를 결정(決定)하고 을미(乙未) 팔월(八月)에 일변(一邊) 대원군(大院君)을 데려내어 먼저 궁중(宮中)으로 들어가고 병사(兵士)와 검객(劍客)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친아(親俄) 정책(政策)을 주장(主張)하고 있는 민비(閔妃)를 해(害)한 후(後) 그 시신(屍身)을 소화(燒火)하고 일변(一邊) 삼포(三浦) 자신(自身)은 왕(王)에게 뵈고 친아(親俄) 파(派)를 쫓아낼 것과 개화파(開化派) 내각(內閣)을 재(再) 조직(組織)할 것을 강청(强請)하여 왕(王)의 승인(承認)을 얻으니 이를 팔월을미지변(八月乙未之變)이라 한다. 이 사변(事變)이 외교상(外交上)으로 거북한 문제(問題)가 됨에 일본(日本)은 삼포(三浦) 이하(以下) 관계자(關係者)를 소환(召還)하여 투옥(投獄)하였다.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은 다시 개혁안(改革案)을 진행(進行)하여 구력(舊曆)을 폐지(廢止)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채용(採用)하며 단발령(斷髮令)을 영포(領布)하면서 일왕일원(一王一元)의 연호(年號)를 세우기로 하여 병신(丙申)으로부터 건양(建陽)이라 채(採)할 것을 결정(決定)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강압수단(强壓手段)은 일반(一般)의 악감(惡感)을 사고 더욱이 민비(閔妃)의 시해(弑害)는 왕(王)의 부자(父子)의 지한(至恨)이 되어 개화당(開化黨)의 시정(施政)은 잘 진행(進行)되지 아니하였고 한편(便)으로 박정양(朴定陽) 등(等) 친아(親俄) 파(派)의 암중운동(暗中運動)이 있어 건양(建陽) 원년(元年) 이월(二月)에 왕(王)과 태자(太子)가 궁중(宮中)에서 벗어나서 아국(俄國) 사관(使舘)으로 옮겨가고 정국(政局)이 일변(一變)하여 개화(開化)의 신법령(新法令)은 많이 철폐(撤廢)되고 아국(俄國)의 세력(勢力)이 우리 나라 궁정(宮廷)에 깊이 뿌리를 박고 김홍집(金弘集)은 난(亂) 중(中)에 맞아죽고 그 밖의 친일파(親日派)는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각(各) 지방(地方)에는 국모(國母)의 원수(怨讐)를 갚고 단발(斷髮)을 반대(反對)한다하여 의병(義兵)이 일러 나서 국내(國內)가 소연(騷然)하였다.
고종(高宗)은 아관(俄館)에 머무르기 일년(一年)만에 정유(丁酉) 이월(二月)에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에 돌아갔다. 그리고 기미독립(己未獨立) 후(後) 하지 못한 바를 결정(決定)하여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고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특파대사(特派大使) 또는 전권공사(全權公使)를 각국(各國)에 파견(派遣)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허울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으나 군상신하(君上臣下)의 아무 데서도 새로운 정신(精神)을 가다듬은 실상(實相)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관정(官廷)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친아파(親俄派)의 굴혈(窟穴)이 되어서 아국(俄國)의 심부름하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광무(光武)원년(元年) 구월(九月)에는 아국(俄國)이 반(半)넘어 위협(威脅)으로써 우리 군대(軍隊)의 교련(敎鍊)과 재정(財政)의 처리(處理)를 수중(手中)에 거두어가며 일변(一邊) 광산(鑛山) 삼림(森林) 기타(其他)의 이권(利權)을 훔쳐가기에 열중(熱中)하며 또 해군(海軍) 근거지(根據地)로 마산(馬山)을 조차(租借)하려는 음모(陰謀)도 진행(進行)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의 당인(黨人)으로서 미국(美國)에 망명(亡命)하여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건양(建陽) 원년(元年) 미국(美國)에서 돌아와서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의 고문(顧問)으로 있으면서 독립문(獨立門)을 짓고 신문(新聞)을 내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 국민정신(國民精神) 계발(啓發)에 힘쓰더니, 아국(俄國)의 이러한 야심(野心)을 보고 맹렬(猛烈)히 일어나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키니 아국(俄國)의 행동(行動)이 크게 퇴축(退縮)되고 마산(馬山) 조차(租借) 문제(問題)도 미연(未然) 방지(防止)되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내정(內政)의 개혁상(改革上)에 많은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하였으나 정부(政府)나 민간(民間)이 모두 입으로만 떠들 뿐이오 실천(實踐)에 대한 계획(計劃)과 열의(熱意)가 없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직 광무년간(光武年間)에 새로운 시설(施設)이 전(前)보다 많았으니 원년(元年)에는 경성(京城) 인천(仁川)간(間)에 전선(電線)을 가설(架設)하고 이년(二年)에는 경성(京城)에 전차(電車)가 놓이고 삼년(三年)에는 경인철도(京仁鐵道)가 개통(開通)되었다.
아국(俄國)이 우리 나라에 가까워 짐음 일본(日本)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써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에 대(對)해서 한국문제(韓國問題)에 관(關)한 협의(協議)를 구(求)하여 두어 차례 내약(內約)도 성립(成立)되었다. 그러나 아국(俄國)은 불같은 남하욕(南下慾)을 그러한 내약(內約)에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또 만주(滿洲)의 경영(經營)에 착수(着手)하여 광무(光武) 이년(二年)에 청국(淸國)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조차(租借)하여 여순구(旅順口)에 군항(軍港)을 설비(設備)하고 만주(滿洲)철도(鐵道)의 부설권(敷設權)을 얻으며 일변(一邊) 조선(朝鮮)의 진해만(鎭海灣)의 밤구미(마산포의 한 지역)를 조차(租借)하여 그 야심(野心)이 점점 들어 났다. 다시 광무(光武) 사년(四年) 청국(淸國)에 의화단(義和團)의 난(亂)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만주(滿洲)를 군사점령하(軍事占領下)에 두고 각국(各國)의 말에 이기지 못하여 철병(撤兵)한다는 기한(期限)을 정(定)하되 그는 형식(形式)뿐이오 실행(實行)하지는 아니 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의 남하(南下)를 제어(制御)하려하여 광무(光武) 육년(六年) 일월(一月)에 일영동맹(日英同盟)을 맺으니 그 대개(大槪)는 한청양국(韓淸兩國)의 독립(獨立)과 및 그 영토(領土)를 보전(保全)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에서 영국(英國)은 청국(淸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것이 침해(侵害)되는 때에는 양국(兩國)이 공동(公同)으로 필요(必要)한 조치(措置)를 하며 또 양국(兩國) 중(中) 일국(一國)이 타국(他國)과 개전(開戰)하는 때에는 일국(一國)은 엄정(嚴正) 중립(中立)을 지킨다 함이었다. 아국(俄國)에서는 일영동맹(日英同盟)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아불동맹(俄佛同盟)을 맺어 극동(極東)에 있는 양국(兩國)의 이익(利益)을 공동(共同)으로 보호(保護)한다 하였다.
일본(日本)과 영국(英國)이 동맹(同盟)을 맺어 소위(所謂) 한국(韓國)의 독립(獨立)과 영토보전(領土保全)한다 함은 한국(韓國)의 이익을 위(爲)함이 아니라 한국(韓國)이 아국(俄國)에게 탈취(奪取)됨을 방지(防止)하고 일본(日本)이 탈취(奪取)하겠다는 뜻이니 이때로부터 한국(韓國)은 완전(完全)히 열강(列强)의 조상육(俎上肉)이 된 것이오 자주독립(自主獨立)하는 역사(歷史)는 이미 끊어진 것이다.
아국(俄國)은 만주(滿洲)에서 철병(撤兵)할 성의(誠意)를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광무(光武) 칠년(七年)에는 한국(韓國)으로 손을 뻗어서 일변(一邊) 용암포(龍巖浦)(압록강 하구 평북)의 조차(租借)를 구(求)하고 일변(一邊) 군대(軍隊)를 그리로 보내서 벌목(伐木)과 건축(建築)의 사업을 시작(始作)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과 최후(最後)의 교섭(交涉)을 시(始)하여 아국(俄國)이 만주(滿洲)와 한국(韓國)에서 손을 떼기를 요구(要求)하여 아국(俄國)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북위(北緯) 삼십구도(三十九度) 이상(以上)의 우리 나라의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의 땅을 중립지대(中立地帶)로 하기를 요구(要求)하고 조금도 양보(讓步)하려 하지 아니하더니 광무(光武) 팔년(八年) 이월(二月)에 마침내 일아전쟁(日俄戰爭)이 일어났다. 일아(日俄)의 풍운(風雲)이 급(急)하여짐에 우리 정부(政府)는 미리 국외중립(國外中立)을 선언(宣言)하였으나 전쟁(戰爭)의 시작(始作)됨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이 연속(連續) 입국(入國)하여 국토(國土)의 일부(一部)가 전쟁(戰爭)으로 화(化)하고 아국(俄國)의 패퇴(敗退)를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력(壓力)이 그대로 커졌다. 그리하여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시정개선(施政改善)의 충고권(忠告權)과 외교기능(外交機能)의 제한권(制限權)을 가지고 다시 재정(財政)과 외교(外交)의 감독권(監督權)을 가지고 정부(政府) 각(各) 기관(機關)에 일본인(日本人) 고문(顧問)이 들어앉고 이 동안에 경의(京義) 경원(京元)의 양(兩) 철도(鐵道) 부설권(敷設權) 이하(以下)로 허다(許多)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어 통신사업(通信事業)도 일본(日本)의 것이 되었다.
광무(光武) 구년(九年)에 일본(日本)이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대승(大勝)하고 또 아국(俄國) 해군(海軍)이 대마해협(對馬海峽)에서 치명상(致命傷)을 받아 전국(戰局)의 대세(大勢)가 이미 정(定)하매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 루즈벨트가 이 중간(中間)에 들어 양국(兩國)의 강화조약(講和條約)이 포츠머스(뉴햄프셔주)에서 조인(調印)되어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군사상(軍事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이익(利益)이 승인(承認)되었다.
일본(日本)은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와서 위협(威脅)으로써 협약(協約)을 맺으니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고 통감(統監)을 경성(京城)에 두어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보통(普通) 이른바 오조약(五條約) 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條約)은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반대(反對)하고 황제(皇帝)가 서명(署名)을 거절(拒絶)한 때문에 형식(形式)을 갖추지 못하고 일방적(一方的)으로 실행(實行)된 것이다.
이 조약(條約)이 한번 발포(發布)됨에 국민(國民) 상하(上下)의 분격(憤激)이 극도(極度)에 달(達)하고 오랫동안 한국(韓國)의 보전(保全)과 동양평화(東洋平和)를 공약(公約)해 오던 일본(日本)의 무신의(無信義)함을 통매(痛罵)하여 한신(韓臣)들 중에는 조약(條約) 폐기(廢棄)를 소청(疏請)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이하(以下) 순국(殉國)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조병세(趙秉世)는 그 유서(遺書)에 「강린(强隣)이 조약(條約)을 져버리고 도적(盜賊)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서 우리의 자손(子孫)이 이 장차(將次) 남의 노예(奴隸)가 될 것이니 바라건대 동포(同胞)들은 각자(各自)가 분발(奮發)하여 독립(獨立)의 기초(基礎)를 닦으라」하고 민영환(閔泳煥)의 유서(遺書)에서는「내가 죽어도 지하(地下)에서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위(爲)하여 싸우리니 동포(同胞)들은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말고 천만번(千萬番) 분발(奮發)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學問)을 더욱 힘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회복(恢復)하면 나는 저승에서 기뻐하리라」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한국병합(韓國倂合)에 대(對)한 방안(方案)은 이미 결정(決定)되고 시기(時機)만 기다릴 뿐이더니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 화란(和蘭)(네델란드) 해아(海牙)(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매 한국(韓國) 황제(皇帝)의 밀사(密使) 이상설(李相卨) 이준(李雋)이 해아(海牙)에 가서 협약(協約)의 무효(無效)함을 역설(力說)하니 이에 일본(日本)이 그 책임(責任)을 묻는다 하여 황제(皇帝)를 퇴위(退位)시켜 태황제(太皇帝)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워 황제(皇帝)를 삼고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라 고치고 일체(一切) 행정(行政)을 통감(統監)의 지휘(指揮)를 받고 일본인(日本人)을 한국(韓國)의 관리(官吏)로 임용(任用)하기로 하는 동시(同時)에 군대(軍隊)를 해산(解産)하고 각부(各部)의 차관(次官)에 일본인(日本人)을 임용(任用)하여 소위(所謂) 차관정치(次官政治)가 실현(實現)되었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청국(淸國)의 봉금지(封禁地)로 되어 만주족(滿洲族) 이외(以外)의 인민(人民)의 입거(入居)함을 허락(許諾)하지 아니하더니 어느 틈에 청국(淸國)의 산동지방(山東地方)의 유민(流民)들이 입주(入住)하여 우리 고종(高宗) 초년(初年)에는 이미 억제(抑制)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청국(淸國)의 토문강(土門江) 일대(一帶) 지방(地方)을 정식(正式)으로 개방(開放)하기로 하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조사(調査)할 때 그곳이 이미 조선인(朝鮮人)의 집단(集團) 거주(居住)로 된 것을 발견(發見)하였다. 이에 청국(淸國)에서는 조선인(朝鮮人)에게 청국(淸國) 민속(民俗)을 좇거나 조선(朝鮮)으로 철환(撤還)하거나 양자(兩者) 중(中)에 그 하나를 택(擇)하라고 하였다. 조선인(朝鮮人)은 그대로 살되 청국(淸國) 풍속(風俗)을 좇지 아니하겠다 하여 말썽이 되더니 이십년(二十年)에 어윤중(魚允中)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 두만강(豆滿江) 연변(沿邊)을 시찰(視察)할 때에 이 사정(事情)을 알고 이는 국세민생(國勢民生)의 큰 문제(問題)라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와 그 부근(附近)의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그 결과(結果)로 정계비(定界碑)에서 가까이 나오는 물은 동북(東北)의 방향(方向)으로 흐르다가 토문(土門)의 형상(形狀)을 짓고 지금 간도지방(間島地方)을 휩싸 흐르는 것을 발견(發見)하고 토문강(土門江)이라는 것은 곧 이 물이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소속(所屬)임을 판정(判定)하였고 청국(淸國)에서는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豆滿江)의 별명(別名)이라 하여 양국(兩國)의 주장(主張)이 서로 대립(對立)되었다. 이십이년(二十二年)에 양국(兩國)은 실지(實地)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청국(淸國)에서 그 주장(主張)하는 근거(根據)가 부족(不足)함을 깨닫고도 오히려 굴(屈)하지 아니하고 조선(朝鮮)에서도 기어(期於)히 주장(主張)을 관철(貫徹)하려하여 이래(爾來) 수십년(數十年)에 문제(問題)의 해결(解決)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국(韓國)의 외교(外交)가 일본(日本)으로 넘어감에 간도문제(間島問題)가 청일(淸日)사이의 분쟁(紛爭)이 되고 처음에는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의 방침(方針)대로 간도(間島)를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정(定)하고 행정기관(行政機關)을 간도(間島)의 용정촌(龍井村)에 두고 조선인민(朝鮮人民)을 거느리더니 융희(隆熙) 삼년(三年)에 일본(日本)이 남만주(南滿州) 철도(鐵道)의 안봉선(安奉線)을 고쳐 놓을 때에 청국(淸國)이 일본(日本)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함에 일본(日本)은 철도(鐵道)용지(用地) 문제(問題)를 일본(日本)의 요구(要求)대로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간도(間島)를 청국영토(淸國領土)로 인정(認定)하였다. 그리하여 간도(間島)의 주권(主權)은 청국(淸國)에 주고 한국인민(韓國人民)은 전(前)과 같이 자유(自由)로 거주(居住)하면서 청국(淸國)의 법권(法權)에 복종(服從)하며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는 개방지(開放地)로 하여 이쪽의 영사관(領事館)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간도문제(間島問題)는 일본(日本)이 저희 본국(本國)의 이익(利益)을 위(爲)하여 청국(淸國)에 준 것이오 한국(韓國)의 승인(承認)한 것이 아님으로 금후(今後)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사이에 다시 분쟁(紛爭)이 일어날 문제(問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