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0.

병자호란



병자호란(丙子胡亂)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밖에 있는 여진족(女眞族) 즉(卽) 야인(野人)은 명(明)나라에서도 억제(抑制)하기 어려워서 항상(恒常) 회유(懷柔)하여 오던 터이라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 나라 북변(北邊)을 침입(侵入)하려는 계획(計劃)이 있었는데, 만일 이때에 야인(野人)이 침범(侵犯)하였다면 우리 나라는 복배(腹背)로 적(敵)을 받아서 지탱(支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육진(六鎭)의 수비를 튼튼히 한 까닭에 아무 일 없었다. 그 후(後)에 야인(野人)들은 명(明)나라 세력(勢力)이 약(弱)해짐을 보고 점차(漸次)로 기세(氣勢)를 펴는 중(中)에 여진족(女眞族)중(中)에서 노아합적(奴兒哈赤)(누르하치)이 일어나서 만주(滿洲)에 있는 여러 부족(部族)을 통일(統一)하고 광해군(光海君) 팔년(八年)에 임금이 되고 왕호(王號)를 「대한(大汗)」이라 하고 심양(瀋陽)(봉천(奉天))에 도(都)하고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맹렬(猛烈)한 기세(氣勢)로 명(明)나라에 쳐들어갔다. 명(明)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였음으로 광해군(光海君)은 강홍립(姜弘立) 등(等)으로 하여금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을 거느리고 가서 명(明)나라를 돕게 하니 이는 임진(壬辰)란(亂)의 은혜(恩惠)를 갑기 위(爲)함이라 그러나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패(敗)하고 강홍립(姜弘立)은 만주(滿洲)에 항복(降服)하고 그 후(後)로부터 광해군(光海君)은 될수록 중립(中立)을 지켜서 만주(滿洲)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와서 동맹(同盟)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하고 또 명(明)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보내기를 교섭(交涉)하였으되 역시(亦是) 주저(躊躇)하고 있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광해군(光海君)의 중립정책(中立政策)이 명(明)나라에 대(對)한 의리(義理)에 어긋났다하여 가도(假島)(평안도 피섬)에 와 있는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을 도와서 그와 긴밀(緊密)한 관계(關係)를 맺었다.
처음에 인조반정(仁祖反正)할 때에 이괄(李适)의 공(功)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이괄(李适)의 마음에 만족(滿足)치 아니하였음으로 이괄(李适)은 평안도(平安道)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풍우(風雨)같이 달려와서 경성(京城)을 점령(占領)하였다. 인조(仁祖)는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에 피난(避難)하고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 이서(李曙) 등(等)으로 하여금 이를 쳐서 깨뜨리고 이괄(李适)이하 여러 수령(首領)들을 죽이니 그 여당(餘黨)이 만주(滿洲)로 도망(逃亡)하여 들어가서 만주(滿洲) 임금 태종(太宗)을 충동(衝動)시켜 조선(朝鮮)을 치기를 청(請)하였다.
이때 만주(滿洲)는 우리 나라가 명(明)나라를 돕고 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던 차(次)이라 아민(阿敏)이라는 장수(將帥)로 하여금 군사(軍士) 삼만(三萬)을 거느리고 인조(仁祖) 오년(五年) 정묘(丁卯)에 쳐들어왔다. 조정(朝廷)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적군(敵軍)을 막고 왕(王仁祖)은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難)하더니 마침내 그들과 형제(兄弟)의 의(誼)를 맺고 적군(敵軍)이 물러가니 이를 정묘호란(丁卯虎亂)이라 한다.
그 후(後) 만주(滿洲)의 세력(勢力)은 더욱 강(强)해지고 그 임금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太宗)은 용병(用兵)을 잘하여 중국(中國)과 몽고(蒙古)를 점차(漸次)로 약취(略取)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형제국(兄弟國)의 약조(約條)를 고쳐서 군신(君臣)국(國)으로 만들자고 함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분(憤)하게 여겨서 그들과 절교(絶交)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만주(滿洲)는 국호(國號)를 청(淸)이라 고치고 천자(天子)의 호(號)를 칭(稱)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저희에게 존호(尊號)를 바치라고 요구(要求)하니 이에 양국(兩國)의 국교(國交)는 몹시 험악(險惡)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에서는 청병(淸兵)이 반드시 침입(侵入)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직 입으로 청국(淸國)을 배척(排斥)하는 소리만 높을 뿐이오 침입(侵入)하는 것을 막을만한 준비(準備)는 전연(全然) 없었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미 양국(兩國)의 화(和)가 끊어지고 또 방비책(防備策)도 세우지 않으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근심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윤황(尹煌)(八松)같은 이는 「이미 和하지 못하고 또 싸우지도 못하면 이는 앉아서 나라를 亡케 함이라 다시 和할 수가 없다면 싸울 準備를 急히 갖춰야 될 것인데 只今에 軍士도 없고 軍糧도 없으니 이제로부터 이를 準備하여 淸兵을 막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오직 한가지 방법(方法)은 왕(王)이 여러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모두 창(槍)을 집고 활을 메고 선진(先陣)에 나가서 개성(開城)이나 평양(平壤)에 진주(進駐)하여 전국(全國)에 호령(號令)을 내리면 이 소식(消息)을 들은 의병사(義兵士)들이 반드시 무기(武器)를 준비(準備)하고 양식(糧食)을 등에 지고 스스로 달려와서 국난(國難)에 부(赴)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순월(旬月)사이에 정병(精兵)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방법(方法)만이 나라를 구(救)하는 길이라」하여 친정론(親征論)을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나 조정(朝廷) 내(內)에는 김류(金瑬)와 김자점(金自點)의 세력(勢力)싸움이 벌어지고 붓대와 혀끝으로 적(敵)을 꾸짖을 뿐이오 아무런 계획(計劃)도 없는 자(者)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니 이 친정론(親征論)이 실행(實行)되지 못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中)에 인조(仁祖) 십사년(十四年) 병자(丙子) 십이월(十二月)에 청태종(淸太宗)이 스스로 군사(軍士) 십만(十萬)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이때 우리 나라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고송(孤松))이 의주(義州)부윤(府尹)으로 있으면서 백마(白馬)산성(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으로 청병(淸兵)은 이를 피(避)하여 창성(昌城)의 간도(間道)로 나와서 도중(道中)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경성(京城)에 통보(通報)하는 길을 끊고 신도겸행(信道兼行)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넌지 사월(四月)만에 선진(先陣)이 경성(京城) 교외(郊外) 십여리허(十餘里許)에 이르니 조정(朝廷)에서는 몽상(夢想)도 못하던 일이라 상하(上下)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저 왕자(王子)를 비롯하여 대신(大臣)들의 가족(家族)을 강화도(江華島)로 피난(避難)시키니 이는 청병(淸兵)이 침입(侵入)하는 때에 가장 안전(安全)한 피난지(避難地)로 설비(設備)하여 둔 곳이오 또 청병(淸兵)을 막을 준비(準備)를 하지 아니한 것도 전(專)혀 이 강화도(江華島)를 믿었기 때문이다.
왕(王仁祖)은 제신(諸臣)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반월(半月)로 나가려 하더니 청병(淸兵)이 이미 길을 막았음으로 급(急)히 동대문(東大門)을 나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청병(淸兵)이 뒤를 따라 성(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성(城)에 농거(籠居)한지 사십일(四十日)에 근왕병(勤王兵)은 이르지 아니하고 양식(糧食)이 핍절(乏絶)하여 마(馬)를 잡아먹게 되고 성중(城中) 인심(人心)이 크게 위구(危懼)하여 고성(孤城)을 지키기 어려운 형편(形便)이었다. 하루는 왕(王仁祖)이 성(城)을 순시(巡視)하더니 한 군졸(軍卒)이 왕(王)전(前)에 나와 업드려 말하되 「지금 대장(大將)된 사람은 목숨을 아껴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비단 옷을 입고 성(城)아래에 앉아서 우리 군졸(軍卒)을 독전(督戰)하니 이런 대장(大將)은 아무 소용(所用)이 없는 것인즉 우리 군졸(軍卒) 중(中)에서 대장(大將)을 정(定)하여 주시면 사력(死力)을 내어 싸우리라」하니 왕(王)은 군심(軍心)이 이미 변(變)함을 보고 크게 놀라서 제신(諸臣)과 이를 의론(議論)하는데 혹시(或是) 군변(軍變)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화도(江華島)를 지키는 대장(大將)은 청병(淸兵)이 바다를 건너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굳게 믿고 매일(每日) 주연(酒宴)을 베풀고 놀더니 뜻밖에 청병(淸兵)이 성하(城下)에 이르러 쳐들어 왔다. 성중(城中)에서는 비록 군사(軍士)는 있었으나 수족(手足)을 놀릴 사이 없이 함락(陷落)되고 피난(避難) 나갔던 왕자(王子)이하(以下)가 모두 포로(捕虜)되고 대신(大臣)들 가족(家族)의 부녀(婦女)들은 능욕(凌辱)을 당(當)할 것을 두려하여 혹은 목매어 죽고 혹(或)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 참상(慘狀)을 참아 볼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는 강화도(江華島) 함락(陷落)의 소식(消息)을 듣고 모두 낙담(落膽)하여 더 항전(抗戰)할 기(氣)를 전연(全然)잃고 왕(王仁祖)과 최명길(崔鳴吉)(지천(遲川))등(等)은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게 되니 이 화의(和議)라 함은 동등(同等)한 국가(國家)로써 화친(和親)하는 것이 아니오 청(淸)에 굴복(屈服)하고 천자(天子)로 모시는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服)이다. 이에 조신(朝臣) 중(中) 척화파(斥和派)는 군신(君臣)이 모두 전사(戰死)할지언정 결(決)코 오랑캐의 앞에 굴슬(屈膝)하고 살지는 못하리라 하고 최명길(崔鳴吉) 등(等) 주화파(主和派)를 매국적(賣國賊)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왕(王仁祖)은 한갓 죽는 것은 국가(國家)를 위(爲)함이 아니라 하고 다음해 정축(丁丑) 정월(正月)에 삼전도(三田渡)(송파)에서 청병(淸兵)에 항복(降服)하였다.
이에 청태종(淸太宗)은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人質)로 하고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신(斥和臣)과 수천명(數千名)의 포로(捕虜)를 끌고 군사(軍士)를 돌렸다.
이때 최명길(崔鳴吉)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파(斥和派)의 사이에 서로 의심(疑心)이 생긴 까닭은 척화파(斥和派)는 주화파(主和派)로써 부귀(富貴)를 탐(貪)내어 청국(淸國)에 항복(降服)하여 그 지위(地位)를 굳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주화파(主和派)는 척화파(斥和派)로써 참으로 대의(大義)를 세우는 것이 아니오 조명(釣名)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 뒤에 청국(淸國)은 명국(明國)을 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군사(軍士)를 보내기를 강요(强要)하니 최명길(崔鳴吉)이 극력(極力) 반대(反對)함으로 청(淸)은 최명길(崔鳴吉)을 불러다가 옥(獄)에 가두었다.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은 모두 사생(死生)이 눈앞에 박두(迫頭)하되 조금도 굴(屈)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대의(大義)를 지켰음으로 종래(從來) 양파(兩派)사이의 모든 의심(疑心)과 오해(誤解)가 풀려버렸다.
우리 나라 사람이 청병(淸兵)에게 잡혀간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청국(淸國)은 명(明)나라를 칠 군사(軍士)를 보내라고 계속(繼續)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포로(捕虜)된 사람을 돌려오는 것과 군사(軍士)보내기를 거절(拒絶)하는 것이 대청외교(對淸外交)의 가장 중요(重要)한 일이었다. 그러나 청(淸)의 힘이 늘어서 군사(軍士)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임경업(林慶業)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명병(明兵)과 싸우게 되자 군사(軍士) 중(中)에 도망(逃亡)하여 명(明)나라에 들어가서 청병(淸兵)의 내용(內容)을 알려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또 포로(捕虜)된 사람을 담배를 주고 돌려온 일이 있으니 담배는 광해군(光海君) 때에 일본(日本)을 거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몇 해 아니 되어 국내(國內)에 퍼져서 한 생산업(生産業)이 되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는, 삼국시대(三國時代)는 혹(或)은 대등(對等)한 지위(地位)로써 교제(交際)하고 혹(或)은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더니 몽고(蒙古) 침입(侵入) 후(後)에 그 힘에 굴복(屈服)하여 완전(完全)한 군신(君臣) 관계(關係)가 되고 고려말(高麗末)에 명(明)나라가 중국(中國)을 차지하자 자진(自進)하여 군신(君臣) 관계(關係)를 맺으니 이는 북방(北方) 호족(胡族)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적대감정(敵對感情)을 가지면서 한족(漢族)에 대(對)하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는 고래(古來)의 한 전통(傳統)이었다. 그런데 청국(淸國)은 호족(胡族)이라 국인(國人) 전체(全體)가 그에게 굴복(屈服)하기를 싫어하고 힘만 있으면 그를 쳐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병자(丙子)의 란(亂)에 힘이 원체(元體) 부족(不足)하여 굴복(屈服)하기는 하였으나 청(淸)에 대한 반항심(反抗心)은 더욱 굳어졌다. 인질(人質)로 갔던 왕자(王子)는 십년(十年)만에 돌아오더니 세자(世子)는 십년(十年) 노고(勞苦)에 귀국(歸國)한지 얼마 아니 되어 병사(病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왕(王)이 되니 이가 효종(孝宗)이다.
효종(孝宗)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백반고초(百般苦楚)를 비상(備嘗)하고 또 청병(淸兵)에 종사(從事)한 일이 있어 그들의 실력(實力)을 잘 알고 있는지라 왕(王)이 된 후(後)에 청(淸)의 원수(怨讐)를 갚을 생각이 간절(懇切)하여 북벌(北伐)할 뜻을 품었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우암(尤庵)등(等)과 더불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꾸미고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조련(調練)시키고 각지(各地)에 전마(戰馬)를 기르고 주요(主要)한 병참지(兵站地)에 군량(軍糧)을 저치(儲置)하였다. 그리고 이조(李朝)건국(建國)한지 이백오십여년(二百五十餘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의 사로(仕路)를 막고 가혹(苛酷)한 차별(差別) 대우(待遇)를 하더니 강대(强大)한 청국(淸國)을 치려니 자연(自然)히 서북인(西北人)의 힘을 합(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서북인(西北人) 조용(調用)의 논(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종래(從來)에 문(文)은 지평장령(持平掌令)에 지나지 못하고 무(武)는 만호첨사(萬戶僉使)에 지나지 못하던 것을 겨우 일이(一二)계급(階級)을 올려 주자는 데 불과(不過)하고 이것조차 조정(朝廷)안의 양반계급(兩班階級)의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순편(順便)하게 진행(進行)치 못하였다.
한편(便)으로 청국(淸國)과 교통(交通)한 뒤로 중국(中國)의 학문(學問)과 산업(産業)방면(方面)을 보고 돌아온 학자(學者)들 중(中)에는 우리 자체(自體)의 비판(批判)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청국(淸國)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發達)하고 서양학술(西洋學術)이 수입(收入)되어 널리 퍼지고 있는 때이라 우리 나라 사신(使臣)들이 당시(當時) 청(淸)의 서울인 북경(北京)을 내왕(來往)하면서 이러한 중국(中國) 학술(學術)방면(方面)에 눈뜨기 시작(始作)하고 우리의 종래(從來)의 성리학(性理學)만으로는 국력(國力)을 크게 할 수 없으니 위선(爲先) 우리의 고유한 문화(文化)와 역사(歷史) 지리(地理) 등(等)을 연구(硏究)하는 동시(同時)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學問)을 넓혀서 국내(國內)의 산업(産業)과 외국무역(外國貿易)을 진흥(振興)시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북학론(北學論)이라 이르고 북학(北學)이라 함은 북(北)으로 선진국(先進國)을 배운다는 뜻이다.
북학론(北學論)을 생(生)하는 학파(學派)를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또는 실학파(實學派)라 하는데 그중(中) 먼저 주창(主唱)한 사람은 유명(有名)한 경제학자(經濟學者)로 칭(稱)하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이었고 실학(實學)의 주창(主唱)은 종래(從來) 정주학(程朱學)만을 숭고(崇高)하던 학풍(學風)의 일대(一大) 변화(變化)이오 또한 침체(沈滯)한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에 일대(一大) 청신기분(淸新氣分)을 주입(注入)한 것이었다.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김육(金堉)(잠곡(潛谷)이 중국(中國)으로부터 철전(鐵錢)을 수입(收入)하여 철화(鐵貨) 제도(制度)의 확립(確立)을 꾀하니 이는 면포(綿布)를 화폐(貨幣)로 사용(使用)하여서는 국내(國內)의 산업(産業)이 발달(發達)될 수 없음으로 기어(期於)히 철화(鐵貨)로써 통화(通貨)를 삼으려 한 것이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주전(鑄錢)을 시작(始作)함으로부터 육백여년(六百餘年)을 지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철화(鐵貨)가 통화(通貨)로 쓰게 되었으며 또 대동법(大同法)도 김육(金堉)의 강력(强力)한 주장(主張)에 의(依)하여 전국(全國)에 고루 시행(施行)하게 되었다.
또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흉년(凶年)이 자주 드는데 흉년(凶年)의 원인(原因)은 주(主)로 한재(旱災)이었고 특(特)히 수도경작(手稻耕作)에 한재(旱災)가 더욱 심(甚)하였다. 이에 효종(孝宗)은 만주(滿洲)에서 보고 온 수차(水車)를 국중(國中)에 보급(普及)시켜서 관개(灌漑)에 적지 않은 편의(便宜)를 주었다.
효종(孝宗)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세움으로부터 비로소 자기비판(自己批判)이 생겨서 자체(自體)가 얼마나 미약(微弱)하고 침체(沈滯)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학술(學術) 산업(産業) 등(等) 모든 방면(方面)에 개혁(改革)과 쇄신(刷新)의 기운(氣運)이 가득 하였다. 소위(所謂) 북벌(北伐)이라 함은 효종(孝宗)이 복수심(復讐心)에서 나온 일종(一種)의 희망(希望)이오 당시(當時)의 양국(兩國) 국력(國力)을 비교(比較)하여 보아서 결(決)코 실현성(實現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국민(國民) 전체(全體)가 북벌(北伐)의 불가능(不可能)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이를 주장(主張)한 것은 왕(王孝宗)의 뜻을 영합(迎合)하여 자기(自己)의 지위(地位)를 고식(固植)하려 한 것이오 아무 진실성(眞實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후(後)에 윤휴(尹鑴)가 북벌(北伐) 론(論)을 주장(主張)한 것도 또한 조명(釣名)을 위(爲)한 것이었다. 효종(孝宗)은 북벌(北伐)하기 위(爲)하여 총수대(銃手隊)를 양성(養成)하였는데 이때 북만주(北滿州)의 흑룡강(黑龍江) 방면(方面)에서는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인(人) 침략(侵略)이 심(甚)하여 청(淸)과의 사이에 충돌(衝突)이 있으되 청인(淸人)은 항상(恒常) 아(俄) 인(人)에게 패(敗)함으로 청(淸)은 조선(朝鮮) 총수(銃手)의 잘 싸움을 알고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두 번을 우리 총수대(銃手隊)가 들어가서 아(俄) 인(人) 격퇴(擊退)에 성공(成功)하니 이가 우리 나라와 아(俄) 인(人)이 서로 관섭(關涉)한 시초(始初)이었으며 효종(孝宗)은 왕위(王位)에 있은지 십년(十年) (기해(己亥)오월(五月)) 승하(昇遐)하고 북벌(北伐)론(論)은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