徒步一千里로 北쪽雪國을차저 -韓長庚-
十一月下旬 京城에서는 아직 비가 나리든 어느날 저녁에 멀니 北쪽 雪國을 向하야 떠낫다 咸興驛에 下車하야 咸興郡 農民社의 여러 동무를 만나 오래동안 隔阻되얏든 터에 이약이 끗테 이약이가 달녀서 끈칠줄을 몰낫다 날이저문 後에 西로 萬歲橋를 건너 咸興平野의 한복판으로 向하얏다 이곳저곳에 검은 衣服과 푸른 衣服을 입은 勞働者가 왓다갓다하는 것이 뭇지 안어도 水理組合工事의 勞働者임을 알겟다 方今 工事를 하는곳도 잇고 工事를하다가 내버려둔 곳도 잇어 俗談에 「개 삶은 솟」모양으로 아조 混雜하얏다 市塲으로부터 도라가는 塲車들 떼는 무엇에 憤慨하엿는지 興奮된 語調로 대가리도 업고 꼬리도 업는 말을 서로 주고밧고 하엿다
甲: 오늘塲에는 여긔가도 그이약이오 저긔가도 그이약이야
乙: 우리목숨은 그저 갑업는 목숨이자 휴-
丙: 그러기에 남들이 우리들을 죽은지는 오래도 썩은냄새가 안난다고 嘲笑 한다지
丁: 제-기할결 이놈의 世上이······
해는 발서 떠러젓다 塲車들 떼를 헤치고 걸음을 催促하엿다 三日間 이곳에 滯留하면서 某事件의 調査는 마치엇다 咸興市塲에 드러와서 雪國의 旅行券으로 防寒옷 一襲을 準備하야 北으로 白雪이 휘날니는 黃草嶺을 바라보면서 굿센 다리를 움즉엿다 떠난지 잇틀만에 下岐川洞口에 다다르니 이곳은 土地가 瘠薄하야 農業만으로는 生活하기가 어려우나 그 位置가 咸興으로부터 長津 江界 慈坡 三水 甲山에 通하는 關門에 當하고 잇슴으로 녯날부터 運搬業으로 生活을 維持하엿고 道路의 不便으로 運搬具는 純全히 牛駄이엿다 「下岐川사람은 소등에 솟을 걸엇다」는 말까지 생긴만치 牛駄는 매우 盛하엿다 그러든 것이 近來에와서 甲山 三水等地에 드러가는 貨物은 北靑쪽의 自働車에게 빼앗기고 森林鐵道가 下岐川의 中部까지 開通됨으로부터 運搬의 區域이 縮少되고 다시 長津으로 드러가는 貨物의 一部는 亦是 自働車에게 빼앗겻다
不遠한 將來에 森林鐵道가 全通되면 이 地方住民은 모다 失業하겟다하야 只今부터 걱정이 자자하다 疊疊山中을 자여서 中嶺鎭에 이르니 鎭터는 븨여버리고 左右애 殘存한 石築의 쪼각들이 오직 녯날의 國防要塞임을 말하고 잇스며 그 南쪽 山麓에는 新羅英傑 眞興王의 北巡碑가 외로히 서서잇고 그 우에는 夕陽의 가마귀가 어즈러히 울고잇서 보는사람으로하야곰 더욱 今夕의 感을 깁게하엿다 中嶺舊路를 조차 黃草嶺에 올나가니 嶺의 絶頂을 境界로하야 南쪽 咸山은 아직 秋節의 氣分이 떠도는데 北쪽長津一帶는 참말 雪國을 이루엇다 내가 長津에 드러오기가 凡三次인데 恒常 겨울에만 단녀서그런지 雪路로 드러가고 雪路로 나와서 길바닥이 돌인지 모래인지 진흙인지를 보지 못하엿다 가장 親한 金君을 만나 롱담으로
나: 이러한 흙을 보지못하는 곳에서 엇더케 사심니까
동무: 그래도 朝鮮의 樂園이랍니다 隣郡地方에서 生存競爭에 敗北된 사람 들도 이곳에 드러오면 一時糊口는 넉넉히하고 잇담니다
나: 바람과 눈을먹고 사심닛가?
동무: 이 地方이 비록 寒帶에 屬하나 農産物은 豊富함니다 엇던 作物은 咸興平野의 沃土보다도 收穫이 더만슴니다 이제 昭和二年三月에 長津郡農會에서 發表한 本郡主要農産物 一反當平均 收穫高를 보면
種 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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數 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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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 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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價 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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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 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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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良種大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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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五貫(皮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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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貫二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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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十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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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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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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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石(皮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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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斗四十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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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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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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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零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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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二0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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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貫四錢五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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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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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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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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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石五斗(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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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斗一圓七十錢五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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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六十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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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咸興郡)
이것으로 보더라도 大麻갓흔 것은 咸興 水稻보다도 利益이 더 만흔데 더구나 今年穀價로 말하면 咸興水稻는 一斗에 一圓二十錢 內外오 總價格 四十二圓밧게 되지안하니 咸興의 沃沓도 到底히 長津에 追隨치 못합니다
그 동무는 長津자랑을 길게 說明하고 한번 크게웃고 다시 말을이어
동무:長津郡農會에서 發表한 大麻改良法 一反當 栽培試驗成積에 依하면
收入
主産物 上物 九十圓
主産物 下物 五圓
副産物 二圓三十錢
計 九十七圓三十錢
支出
種子代 五圓八十五錢
肥料代 十二圓
地代(小作料) 二圓
勞力費 三十圓
薪代及其他 三圓
計 五十二圓八十五錢
純利益 四十四圓四十五錢
임니다 咸興에서는 總收穫에서 地代와 生産費를 除하면 利益은 그만두고 도로혀 損害가 된다하니 이것으로 보아도 長津은 樂園이 아님니가
나: 鄕土자랑은 그만하시고 귀밀(燕麥)단甘酒나 한그릇 내어오시오
두사람은 서로웃고 단甘酒를 먹으면서 밤이 깁도록 이약이하엿다 燕麥은 長津의 主要한 農産物로 地方住民의 主食物이 될뿐만아니라 最近에 이르러서는 陸軍馬糧으로 가장 好評을 밧고잇으며 燕麥分은 漸次海外에 販路를 開拓하는中에 잇다고하며 長津住民으로서 經濟가 比較的 潤澤한 時機는 十一月로부터 一月까지의 陸軍燕麥放賣와 그 運搬하는 때이라고한다 그러나 그販賣價格과 運賃도 中間奸商 때문에 만흔 搾取를 當하야 結局 農民의 주머니에 드러가는돈은 몃푼 안된다고한다 長津郡 南部에잇는 數 十個所의 里農民社를 巡回하야 或은 社員 或은 幹部를 만나 今後의 일할 것을 이약이하고 발길을 豊山方面으로 돌녓다
十二月六日아침 袂物里를 떠나 袂物嶺을 向하는데 原來 深山窮谷임으로 이곳에는 點心療飢할곳도 업다하야 농대엿(澱分飴) 한되假量울 짊어지고 東으로 長津江을 건너 漸漸 谷中으로 드러갓다 袂物嶺의 前後는 萬樹靑林의 深谷으로 無人地境이 三十里인데 數日前에 商人하나가 牛五匹을 몰고 넘어가다가 中國人勞働者 五人에게 하마터면 큰變을 當할번 하엿다는 所聞까지 잇는 곳이라 나도 혼자넘어가기는 氣分이 조치 못하엿다 嶺下에 이르러 싸가지고가든 엿으로 腸子를 채우고 多行히 靑年 한사람을 만나 同行하엿다 무릅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深林中을 通하야 三十里길을 한번도 쉬지안코 대주먹에 突破하야 西於水에 이르니 등골세 땀이 쫙쫙흐르고 다리는 허둥허둥하엿다 녯적 袂物里 어떤분은 西於水에 愛人을 두고 몃츨에 한번식 저녁後에 西於水에와어 愛人을 만나보고 그날밤으로 도라가도 아모 疲勞를 늣기지 아니하엿다는데 나는 반가히 마저주는 愛人이 업서서 그런지 六十里를 걷고 몹시 疲困하야 저녁 숟가락을 놋튼길로 자버렷다 아침에 이러나보니 밤사이에 盜賊눈이와서 또 雪上加雪이엿다 生길을 헤치고雲山洞을지나 雪麟嶺을 向하는데 이嶺은 袂物嶺보다 더 놉흘뿐만아니라 亦是 前後三十餘里 無人地境이다 이날은 同行도 업고 道路도 險하야 嶺下 一旅店에서 留宿하려다가 最後勇氣를 내여 혼자 올나가기 始作하엿다 여긔서 嶺의 絶頂은 十里이오 때는 午後二時半이엿다 찬바람은 北으로부터 부러오건만 이마와 全身에 땀이 물흐르듯 하엿다 다리가 푹푹빠지는 눈길에 千辛萬苦하야 嶺上에 올라서니 해는 벌서 西山에 걸니고 行人은 그림자도 업는데 아직 人家잇는 곳까지 가자면 거의 二十里나 된다 더구나 嶺의 東便 豊山郡쪽은 길바닥에 눈보라뗌이 山갓치 싸엿다 長津을 普通雪國이라하면 豊山은 大雪帝國이엿다 천천히 걷자니 날이 저무러서 初行길에 무슨 困難을 當할는지 알수업고 빨리걷자니 엉덩까지 빠지는 눈에 발을 옴길수가 업섯다 몃번이나 업허지면서 黃昏이된 뒤에 嶺下 한 火田民집에 當到하엿다 이곳은 僻地의 僻地로서 純全히 火田民地帶이며 有名한 貧民屈이다 三家以上이 一處에 모여사는 곳이 업스며 집과 집사이는 三里乃至 五六里가 되야 敎育機關이나 社會生活機關이 업슴은 勿論이오 일하고 먹고 자고하는 外에는 아무 希望도업고 欲求도 업는듯하다 飮食은 馬鈴薯 귀일밥이오 소곰물에 무수를 담근 것이 唯一한 飯饌이엿다 그러나 소곰도 매우 貴하야 洞口 八十里를 나가야 일俵에 三圓五十錢으로 사온다고 한다 녯적 交通이 不便하든때에 鴨綠江邊 어느 山谷에서 소곰이 엇지도 貴하던지 소곰한줌을 주머니에 너허서 天井에 달아매고 밥한숱가락을 입에너코 소곰을 한번식 쳐다보기로하는데 어린 兒孩가 두 번을 처다보앗드니 그아버지가 여러번 처다보면 소곰이 줄어든다고 야단하엿다는 말도잇지만 이 地方도 北靑 惠山鎭 道路가 開通되기 前에는 그런일이 업지안하엿을 것이다 衣服은 몃해에 한번식 싯는지 모르나 검고 다시검어서 灰色이 되엿다 그理由를 드르면 衣服은 單한벌뿐인데 가라입을것이 업서서 싯지못한다고한다 家屋과 居處와 衣具 갓흔것도 한녯날의 原始生活 그대로 이엿다 그러고 生産品價格은 헐하고 日用品 購入價格은 비싸다 廣木最下品 一尺(朝鮮針尺)에 二十八九錢 燐寸一匣에 一錢 石油한甁(四合)에 三十錢이니 이것으로써 一般物價를 推知할수 잇을 것이다 이번에 實地로 火田民의 집에서자고 火田民의 부엌과 夜具를 求景하고 그들의 慘狀을 새삼스럽게 늣겻다 그들이 비록 敎育을 밧지못하고 意識이 서지못하엿스나 「우리는 웨 이런生活을 하는가」하는 不平은 가득히 가지고 잇섯스며 더구나 「우리는 依支할곳이 업는사람이다」하는 極度의 悲哀를 늣기고 잇슬때에는 겻헤서 듯는사람으로 하야금 눈물을 짜내게하엿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