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6.

역학으로본 사람의 세상살이 <한삼화선생>


역학(易學)으로 본 사람의 세상(世上)살이
一. 사람은 광명(光明)에서
二. 사람의 尊嚴性
三. 세 종교(宗敎)는 삼도일체(三道一體)
四. 사회(社會)의 생장성(生長成)
五. 충 효 열의 삼대륜 (忠 孝 烈의 大三倫)
六. 사람의 삶
一. 사람은 광명(光明)에서
 
우리들 사람은 우주통체(宇宙統體)의 한 분신(分身)을 받아 이세상( 世上)에 태어나고 우주통체(宇宙統體)에는 사람을 창시(創始)하신 주재자(主宰者)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주재자(主宰者)를 하나님이라 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한 처음의 시조(始祖)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사람의 시조(始祖)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시(創始)하신 우주(宇宙)의 대시조(大 始祖)이십니다. 역학(易學)에 천지만물(天地萬物)에는 췌취(萃聚), 감응(感應), 항구(恒久)의 세 가지 정(情)이 있다 한바 이 세 가지 정(情)은 곧 생장(生長), 생식(生殖), 장수(長壽)의 세 가지 본능(本能)이니 천지만물(天地萬物)에 모두 똑같은 본능(本能)이 있다는 것은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두 동일(同一)한 조상(祖上)에서 나온 까닭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학(易學)에는 우주(宇宙)의 주재자(主宰者)를 상제(上帝)라하고 또 상제(上帝)를 조고(祖考)에 배(配)한다하여 이 두 가지의 뜻을 합(合)쳐서 천조상제(天祖上帝)라고 부르고 있으니 천조상제(天祖上帝)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주간(宇宙間)에 존재(存在)하는 만물(萬物)은 모두 살아있는 생명체(生命體)입니다. 무생물(無生物)같이 보이는 해, 달, 땅 같은 것도 모두 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생장성(生長性)의 운동(運動)을하고 있으니 생장성(生長性)의 운동(運動)을하는 그 현상자체(現象自體)가 이미 살아있다는 사징(事徵)입니다. 그러므로 역학(易學)은 이 천지(天地)를 모두 생명체(生命體)로보고 그 생명체(生命體)에는 만물(萬物)을 묘(妙)하게하는 신(神)이 있어 만물(萬物)을 낳고, 기르고, 여물게 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生命體)에는 반드시 자체(自體)가 생생(生生)함에 필요(必要)한 신명(神明)(정신작용精神作用)이 있으니 만일 이 신명(神明)이 없으면 생명체(生命體)는 그 생(生)을 완수(完遂)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지각(知覺)하고 기억(記憶)하고 사고(思考)하고하는 신명(神明)이 있고 모든 동물(動物)들도 정도(程度)의 차(差)는 있으나 모두 얼마만큼의 신명(神明)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한 분신(分身)인 사람에게 이와 같은 신명(神明)이 있다고 하면 우주(宇宙)의 통체(統體)에도 사람과 같이 지각(知覺), 기억(記憶), 사고(思考)의 작용(作用)을 행(行)하는 신명(神明)이 있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는 일이오 이 통체(統體)의 신명(神明)이 곧 하나님의 신명(神明)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람의 몸은 우주통체(宇宙統體)의 일부(一部)를 나눠 가진 것이오 사람의 신명(神明)은 하나님의 신명(神明)의 일부(一部)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肉體)라는 몸 덩어리가 있고 이 몸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신명(神明)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통체(宇宙統體)는 해, 달, 땅등(等) 천체(天體)를 비롯하여 땅위에 있는 온갖 물체(物體)를 모두 합(合)쳐서 한 몸 덩어리로 하고 그 우주(宇宙)의 몸 덩어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주간(宇宙間)의 이러한 온갖 물체(物體)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되 결(決)코 낱낱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오 소위(所謂)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는 큰 힘으로써 서로 연결(連結)되어 한 몸 덩어리로 되고 있으니 역학(易學)에 천하(天下)의 움직임은 늘 일(一)하다 함이 곧 이것입니다. 생물체(生物體)의 신명(神明)은 그 몸 덩어리의 구조(構造)에 적응(適應)하여 깃들이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몸 덩어리는 엄청나게 큰 것임으로 거기에 깃들여 있는 신명(神明)도 또한 엄청나게 큰 하나님의 신명(神明)이십니다. 또 사람은 그 한 몸의 속에서 비록 조그마한 피부(皮膚) 한 점이라도 지극(至極)히 사랑하여 혹시(或是)나 상해(傷害)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그 몸의 어떠한 부분(部分)에 대(對)하여도 사랑치 아니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한 몸 덩어리로 하고 있는 하나님은 비록 일초일목(一草一木) 일충일어( 一虫一魚)라 하더라도 모두 한결같이 사랑하여 그의 생(生)을 완수(完遂)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물(萬物)에 대(對)하여 지공무사(至公無私)하고 어느 하나라도 차별(差別)하거나 경시(輕視)하거나 하는 일이 없으니 역학(易學)에는 이것을 말하기를 만물(萬物)을 곡성(曲成)하여 남김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도 없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에게 마음이라는 신명(神明)이 있으되 누구 하나도 그 신명(神明)을 보거나 듣거나 한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들은 사람도 없으면서, 사람마다 자기(自己)에게 신명(神明)이 있는 것을 의심(疑心)치 아니하고 또 남에게 신명(神明)이 있는 것도 부인(否認)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사람마다 그 신명(神明)으로써 사물(事物)을 생각하고 그 생각하는 바를 좇아서 그 몸이 행동(行動)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자기(自己)의 신명(神明)이 어디서 나오고 또 어떻게 사물(事物)을 생각하는가를 알게되면 스스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고 또 어떻게 사물(萬物)을 창조(創造)하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元來)  신명(神明)은 형질(形質)이 없어서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맛도 냄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질(形質)이 없기 때문에 또한 무한(無限)한 것입니다.
 
모든 물체(物體)가 형질(形質)을 가지고 있는 자(者)는 그 맡은 바의 소임(所任)밖에는 다하지 못하여 눈은 보는 일 이외(以外)에는 하지 못하고 귀는 듣는 일 이외(以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유한(有限)이라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무한(無限)하기 때문에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접응(接應)치 못함이 없고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생각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형질(形質)이 있는 유한(有限)한 자(者)는 나고 없어지고 하는 생멸(生滅)이 있어 항구(恒久)치 못하나 무한(無限)한 신명(神明)은 생멸(生滅)이 없고 일기장존(一氣長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형질(形質)이 없으시기 때문에 또한 무한(無限)하여 우주(宇宙)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접응(接應)치 못하심이 없고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能)치 못하심이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이시며 또 이 우주(宇宙)와 함께 영원불궁(永遠不窮)하신 것입니다. 역학(易學)에는 이 뜻을 말하여 신(神)은 방(方)이 없고 역(易)은 체(體)가 없다하고 또 천지(天地)의 도(道)는 항구(恒久)하여 그치지 아니한다 한 것입니다. 또 역학(易學)에는 물(物)의 생생(生生)함에는 기(氣), 정(精), 형(形)의 순(順)이 있고 무형(無形)한 기(氣)가 맏이로 나타난다하니 이 이(理)에 의(依)하여 만물(萬物)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무형(無形)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온갖 사상(思想)과 계획(計劃)같은 것도 무형(無形)한 신명(神明)에서 나오고 우주간(宇宙間)의 억조물물(億兆物物)도 모두 무형(無形)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지각(知覺)하고 기억(記憶)하고 사고(思考)하고하는가 하는 것은 꼭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물(物)에 비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위에 생생(生生)하고있는 만물(萬物)의 생명(生命)은 모두 태양(太陽)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오 그 생명(生命)이 여러 가지 형태(形態)로 엉켜서 만물(萬物)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간(宇宙間)에는 본시(本是) 태양(太陽)의 소자출(所自出)한 원천화(原天火)가 있고 그 원천화(原天火)의 어느 일점(一點)에 결정(結精)된 불덩어리가 곧 태양(太陽)이니 원천화(原天火)와 태양(太陽)과의 차이(差異)는 그 본질(本質)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는 감추어있고 하나는 나타나있는 차(差)밖에는 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원천화(原天火)는 체(體)가 되고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은 용(用)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속에는 만물(萬物)의 씨가 포함(包含)되어있고 그것이 이 땅위에 내려와서 만물(萬物)로 번식(繁殖)된 것입니다. 사람의 씨도 太陽의 광명(光明)에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신명(神明)도 태양(太陽)과 같이 광명(光明)하여 능(能)히 만사만물(萬事萬物)에 비춰서 그 자태(姿態)를 밝게 나타내는 것이니 이 밝게 비취는 작용(作用)이 곧 지각(知覺)이 되는 것입니다.
 
또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은 허령(虛靈)한 까닭에 능(能)히 만물(萬物)의 씨를 포함(包含)하고 있는 것이오 사람의 신명(神明)도 그러한 광명(光明)을 이어받아서 출생(出生)한 것임으로 역시(亦是) 허령(虛靈)하여 능(能)히 만사만물(萬事萬物)을 포함(包含)하는 것이니 이 포함(包含)하는 작용(作用)이 곧 기억(記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밝음이 커질수록 그 지각(知覺)이 밝아지고 그 포함(包含)함이 넓을수록 그 기억(記憶)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역학(易學)에는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밖으로부터 안에 들어와서 생명(生命)이 되는 것을 천하(天下)에 뇌(雷)가 행(行)하여 물(物)이 감응(感應)한다하고 그 광명(光明)이 안에 쌓이고 위에 빛나는 것을 대축(大畜)이라 하는데 이것은 광휘(光輝)가 빛나서 마음의 체(體)가 날로 새로워지고 기억(記憶)이 넓어서 많이 전언왕행(前言往行)을 안다는 것입니다.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사람에게 내려와서 어떻게 밝은 신명(神明)을 내는가하면 그것은 고지무지(鼓之舞之)하는 뇌동작용(雷動作用)에 의(依)하는 것입니다.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하늘 위에 있을 때에는 강대(强大)한 힘의 양성(陽性)을 띄고 있으나 그것이 이 땅위에 내려오는 때는 도중(途中)에서 음성(陰性)으로 변(變)하고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 화(化)하여 고동(鼓動)하는 운동(運動)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는 역학(易學)에 태양화(太陽火)가 하향(下向)하여 땅에 접(接)하는때에 진뢰(震雷)로 변(變)한다는 이(理)에 의(依)한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과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呼吸)은 모두 이 태양광명(太陽光明)의 뇌동작용(雷動作用)에 의(依)한 것이오 사람의 신명(神明)이 만물(萬物)을 비취는 것도 또한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부터 발생(發生)하는 광명(光明)의 힘입니다.
 
역학(易學)에 고지무지(鼓之舞之)하여써 신(神)을 다한다함은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써 신명(神明)을 밝히는 뜻을 말한 것이며 전(前)에 말한 대축(大畜)의 이(理)로써 보면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심장(心臟)에 깃들여서는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써 고동(鼓動)하여 열(熱)과 빛을 생(生)하고 그 염상(炎上)한 빛은 뇌(腦)에 올라가서 밝음을 발휘(發揮)하는 것입니다. 심장(心臟)은 고동(鼓動)하여 사물(事物)을 결행(決行)하는 작용(作用)을 행(行)함으로 심장(心臟)이 강(强)한 사람은 사물(事物)을 결행(決行)하는 힘이 강(强)한 것이오 뇌(腦)는 지정(止靜)하여 물(物)을 비취는 작용(作用)을 행(行)함으로 뇌(腦)가 밝은 사람은 사물(事物)을 감찰(鑑察)하는 명(明)이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로써보면 낮과 밤의 오고가고 함과 사시(四時)의 열리고 닫히고 함과 조수(潮水)의 밀고 썰고 함과 같은 것이 모두 우주(宇宙)의 노동작용(雷動運動)인 동시(同時)에 우주고동(宇宙鼓動)의 원동력(原動力)이 되는 태양(太陽)의 온 광명(光明)이 곧 하나님의 신명(神明)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명(神明)과 사람의 신명(神明)은 그 본질(本質)은 하나이면서 다만 통체(統體)와 분신(分身)의 차이(差異)가 있을 뿐이니 이 까닭에 역학(易學)에서는 상제(上帝)도 진(震)에서 나오고 만물(萬物)도 진(震)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의 생명(生命)이 태양(太陽)으로부터 나온 까닭에 사람은 잠시(暫時)도 태양(太陽)을 떠나지 못하고 땅과 함께 쉴 사이가 없이 태양(太陽)의 주위(周圍)를 돌고있는 것입니다.
 
 
二. 사람의 尊嚴性
이 땅위에는 동물식물( 動物植物)같은 생물(生物)이 수(數)없이 살고 있으나 그 중(中)에서 오직 사람은 그러한 생물(生物)들과는 크게 구별(區別)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육체(肉體)의 면(面)으로만 보면 동물(動物)과 큰 차(差)가 없는 듯하나 그 생활(生活)하는 면(面)으로 보건대 동물(動物)들은 천연물(天然物)에 아무런 가공(加工)을하지 아니하고 천연(天然)그대로를 먹고사는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동물(動物)들은 그 몸의 조직(組織)이 천연물(天然物)그대로를 먹고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화식(火食)을하기 위(爲)하여는 불을 만들어야하고 음식(飮食)을 끓이기 위(爲)하여는 솥을 만들어야하고 솥을 만들기 위(爲)하여는 광물(鑛物)을 파내야 하고 이거(里居)하기 위(爲)하여는 우물을 파야하고 고기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기 위(爲)하여는 그물을 만들어야하고 농사(農事)를 짓기 위(爲)하여는 쟁기를 만들어야하고 큰물을 건너기 위(爲)하여는 배를 만들어야하고 곡식(穀食)을 찧기 위(爲)하여는 절구를 만들어야하는등(等) 사람의 생활(生活)에 필요(必要)한 기물(器物)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또 동물(動物)들은 간단(簡單)한 집단생활(集團生活)이 있는 이외(以外)에 사회조직(社會組織)이라는 것이 없으나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넓은 사회(社會)를 만들고 공동(共同)으로 생활(生活)하고 있기 때문에 물화(物貨)를 서로 바꾸기 위(爲)하여 시장(市場)을 설(設)하여야하고 도적(盜賊)을 막기 위(爲)하여 수비(守備)를차려야하고 혼례(婚禮)를 정(定)하여 가정(家庭)을 이루어야하고 문자(文字)를 만들어 서로 사상(思想)을 통(通)하여야하는등(等) 온갖 제도(制度)를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그 자신(自身)이 살기 위(爲)하여 천연물(天然物)에 인공(人工)을 가(加)하고 일용(日用)하는 기물(器物)을 만들고 사회생활(社會生活)에 필요(必要)한 온갖 제도(制度)를 만들고 있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이루지 못한 일을 사람이 대신(代身)하여 창조(創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역학(易學)에는 하늘, 땅, 사람을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라하는 것입니다. 재(才)라함은 물건(物件)을 창조(創造)하는 재능(才能)이 있다함을 말함이니, 하늘은 만물(萬物)의 씨를 내려보내고 땅은 그 씨를 받아서 기르고 사람은 천연물(天然物)에 인공(人工)을 가(加)하고 기물(器物), 제도(制度)를 만들고 있어 하늘 땅 사람이 모두 물건(物件)을 창조(創造)하는 재능(才能)이 있으므로 셋을 병칭(竝稱)하여 삼재(三才)라 한 것입니다. 이 땅위의 만물(萬物)은 어느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으나 오직 사람이 삼재(三才)의 자리를 이루고있다 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손자(孫子)라하니 여기에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사람을 특(特)히 손자(孫子)라하고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업(事業)은 이 손자(孫子)들을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천공(天工)은 반드시 기물(器物) 제도(制度)같은 것을 만드는 인공(人工)을 대(待)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도와서 대행(代行)하는 것입니다. 정치(政治)니 학설(學說)이니 산업(産業)이니하는 것은 그 외형(外形)으로는 비록 사람들의 하는 사업(事業)같으나 그 실(實)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사람은 인공(人工)으로써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고 또 대행(代行)하고 있으므로 의지(意志)의 자유(自由)를 가지지 아니하고는 그를 대행(代行)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는 인공(人工)의 시행(施行)되는 영역(領域)이 곧 자유의지(自由意志)의 활동(活動)하는 범위(範圍)로되는 까닭입니다. 동물(動物)같은 것은 비록 먹고사는등(等)의 자유(自由)가 있으나 그것은 다만 천연물(天然物)을 그대로 먹고사는 자유(自由)에 불과(不過)하고 물(物)의 생산가공(生産加工)에 기여(寄與)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은 천지(天地)와 함께 물(物)을 창조(創造)하기 위(爲)하여 이러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하늘로부터 이어받으니 이것을 천부(天賦)의 자유(自由)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으로부터 그 의지(意志)의 자유(自由)를 뺐는다고 하면 이는 물(物)을 창조(創造)하는 재능(才能)과 하나님의 생생사업(生生事業)을 돕는 대행권(代行權)을 아울러 뺐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의 속에는 이 재능(才能)과 대행권(代行權)을 마음대로 행사(行使)하는 의지(意志)의 자유(自由)가 그 중심(中心)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意志)의 자유(自由)가 없는 곳에는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이 보전(保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학(易學)에 천하(天下)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염려(念慮)하리오 천하(天下)가 한곳으로 돌아가되 그 가는 길은 다르고 한결같이 이르되 그 염려(念慮)하는바는 백(百)가지라 천하(天下)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염려(念慮)하리오한 것은 사람에게 행동(行動)의 자유(自由)와 사상(思想)의 자유(自由)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즉(卽) 사람마다 의지(意志)의 자유(自由)로써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는 대행권(代行權)을 행사(行使)하면 천하(天下)는 저절로 한 곳으로 돌아간다 함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사회(社會)에는 그 사회를 다스리는 통치권(統治權)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통치권(統治權)은 그 사회(社會)안에서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대행(代行)하고 있는 뭇 사람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대표(代表)하여 임시(臨時)로 행사(行使)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통치권(統治權)은 개인(個人)의 사유물(私有物)도 아니오 또 영원(永遠)히 계속(繼續)하는 영구권(永久權)도 아니오, 다만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대행(代行)하기 위(爲)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천명(天命)을받고 사람들로부터 위임(委任)을 받은 것이니 역(易學)에는 이것을 천의(天意)에 순(順)하고 인심(人心)에 응(應)함이라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통치권(統治權)을 함부로 휘둘러서 하늘 뜻을 어기고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을 짓밟으면 그는 반드시 혁명(革命)의 대상(對象)이되는 것이니 혁명(革命)이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명(天命)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三. 세 종교(宗敎)는 삼도일체(三道一體) 
우주(宇宙)의 모든 운동(運動)은 하나도 둥근 궤도(軌道)를 환운동(圜運動)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니 사시(四時)와 주야(晝夜)가 그러하고 식물(植物)의 열매로부터 싹이 트고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라든지 벌레가 유충(幼蟲), 번데기, 성충(成蟲)의 순(順)으로 변화(變化)하는 것이라든지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도 그 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땅은 그것을 받아서 기르고 길러낸 사람은 다시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가는 때에 비로소 하늘, 땅, 사람의 환운동(圜運動)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動物)에도 얼마만한 신명(神明)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신체(身體)는 발은 둘로 되어 땅을 밟고 머리는 하나로 되어 하늘을 향(向)하여 삼각형(三角形)으로써 하늘과 땅을 직결(直結)하고 있으므로 사람의 신명(神明)은 위로 올라가서 하늘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나 동물(動物)은 몸이 가로로 놓여 평면(平面)이되고 있으므로 그 신명(神明)은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신명(神明)은 동물(動物)보다 특이(特異)한 것이 있으니 말과 글을 사용(使用)하는 것입니다. 동물(動物)에도 간단(簡單)한 말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말로써 서로 복잡(複雜)한 의사(意思)를 통(通)하는 것은 이 땅위의 만물중(萬物中)에 오직 사람뿐이며 특(特)히 글은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을 초월(超越)하여 먼곳에 지음쳐(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서로 의사(意思)를 통(通)할 수가 있고 몇 천백년전(千百年前)의 일이라도 글로써 그때의 사정(事情)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말과 글이 있는 까닭에 만물중(萬物中)에서 독특(獨特)한 사부(師傅)의 도(道)가 생기고 고왕금래(古往今來)로 수(數)없는 사람의 경험(經驗) 사고(思考)한 성과(成果)를 사제(師弟)의 전수(傳授)에 의(依)하여 더욱 그 신명(神明)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에 사람이 나지 아니하면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나 알을 낳지 못하는 벌레가 환운동(圜運動)을 하지 못함과 같아서 천지(天地)도 환운동(圜運動)을 행(行)치 못하여 생생작용(生生作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삼재(三才)의 환운동(圜運動)은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의 세 층(層)의 길로 도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의 씨가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와서 사람을 창시(創始)하니 이것을 천도(天道)라하고, 땅은 그 씨를 받아서 사람을 낳고 기르니 이것을 지도(地道)라하고 사람은 그 마음을 닦고 밝은 정신(精神)을 스스로 더욱 밝게하여 하나님의 신명(神明)과 서로 통(通)하니 이것을 인도(人道)라하는 것입니다. 인류(人類)의 역사(歷史)가 있은 연후(然後)에 세 큰 성인(聖人)이 나와서 차례로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를 설교(說敎)하시니 그 성인(聖人)은 곧 서가여래(釋迦如來) 공부자(孔夫子) 주(主) 예수이십니다.
 
서가여래(釋迦如來)는 처음으로 나와서 불교(佛敎)를 가르치시니 불교(佛敎)는 천도(天道)를 말한 것임으로 그 교리(敎理)는 창창공공(蒼蒼空空)한 이 대우주(大宇宙)를 상(象)하여 색(色)이 곧 공(空)이오 공(空)이 곧 색(色)이라하고 오로지 창공(蒼空)과 같이 활연대각(豁然大覺)함을 주(主)하고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일을 말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이는 공부자(孔夫子)이시오 공부자(孔夫子)는 유교(儒敎)입니다. 유교(儒敎)는 지도(地道)를 말한 것임으로 그 교리(敎理)는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생활법칙(生活法則)을 주(主)로하여 부모(父母)에게 효(孝)하고 나라에 충(忠)하고 부부(夫婦)가 열(烈)하여야 한다는 대삼륜(大三倫)을 밝힌 것이니, 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대삼륜(大三倫)의 길을 밟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主)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 나와서 기독교(基督敎)를 설(設)하신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인도(人道)를 말한 것임으로 사람이 천당(天堂)으로 간다는 것이오 천당(天堂)은 하나님의 계신 곳이니 이는 사람이 하늘로 돌아가는 환운동(圜運動)의 길을 말한 것입니다. 세계인류(世界人類)가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손자(孫子)가 아닌 이가 없고 세 큰 성인(聖人)이 또한 똑 같은 하나님의 손자(孫子)이시로되 오직 주(主) 예수를 독생자(獨生子)라하는 것은 기독교(基督敎)가 나와서 처음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앞으로 돌아가는 인도(人道)를 가르친 까닭에 부자(父子)의 도(道)에 비겨서 홀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이시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역학(易學)의 정역(正易)에 이르시기를 도(道)가 셋으로 나뉨은 이(理)의 자연(自然)함이니 이는 유(儒)이오 불(佛)이오 선(仙)이라함은 이 세 종교(宗敎)를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종교(宗敎)는 각기(各其)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를 가르친 것이로되 그 근본교리(根本敎理)로서 불교(佛敎)의 자비(慈悲)와 유교(儒敎)의 인(仁)과 기독교(基督敎)의 박애(博愛)는 모두 똑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우주생생(宇宙生生)의 대도덕(大道德)이며 불교(佛敎)의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유교(儒敎)의 상제(上帝)와 기독교(基督敎)의 하나님 아버지도 모두 우주(宇宙)의 주재자(主宰者)이신 동시(同時)에 만물(萬物)의 시조(始祖)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세 종교(宗敎)의 부르는 말이 서로 같지 아니한 까닭은 불교(佛敎)의 천도(天道)는 주(主)로 마음의 각(覺)함을 말한 것임으로 도(道)를 각(覺)하는 신명(神明)의 도道에 비겨서 무량불(無量佛)이라하고 유교(儒敎)의 지도(地道)는 주(主)로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정치(政治)를 말한 것임으로 군신(君臣) 상하(上下)의 도(道)에 비겨서 상제(上帝)라하고 기독교(基督敎)의 인도(人道)는 주(主)로 아들이 아버지의 앞으로 돌아가는 길을 말한 것임으로 부자(父子)의 도(道)에 비겨서 하나님 아버지라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들 사람과의 관계(關係)에 대(對)하여, 이를 혈연(血緣)의 줄로써 보면 하나님은 시조(始祖)이시오 우리들은 손자(孫子)이며 이를 상하(上下)의 분(分)으로써 보면 하나님은 상제(上帝)이시오 우리들은 백성(百姓)이며 이를 교양(敎養)의 공(工)으로써 보면 하나님은 스승이시오 우리들은 제자(弟子)이니 세 종교(宗敎)에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또한 사제의 도(師弟의 道) 군신의도(君臣의 道) 부자의 도(父子의道) 와도 서로 통(通)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종교(宗敎)는 외형(外形)으로는 서로 다른 듯하나 그 실(實)은 한 뿌리로부터 세 줄기가 나온 것입니다.
 
역학(易學)에서는 하나님을 천조상제(天祖上帝)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혈연(血緣)의 줄과 상하(上下)의분(分)을 아울러 말한 것입니다. 세간(世間)에서는 종교(宗敎)를 내세(來世)의 일이라 하여 사후(死後)에 천당극락(天堂極樂)으로 가기 위(爲)하여 믿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역학(易學)에서는 사람의 신명(神明)이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 땅위의 현실사회(現實社會)에 천당극락(天堂極樂)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역학(易學)에 도(道)를 나타내고 덕행(德行)을 신(神)하게하여 신(神)과 수작(酬酌)할 수 있고 신(神)을 도울 수 있다함이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종교(宗敎)는 천지인(天地人)의 삼도일체(三道一體)로서 사람은 어느종교(宗敎)를 믿든지 모두 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즉(卽) 사람은 하늘 속에 살고 있음으로써 천도(天道)인 불교(佛敎)를 믿는 것이오 땅위에 살고 있음으로써 지도(地道)인 유교(儒敎)를 믿는 것이오 사람으로 태어나고 있으므로 인도(人道)인 기독교(基督敎)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 사람은 종교(宗敎)를 믿고 믿지 아니함을 막론(莫論)하고 또 어느 종교(宗敎)를 믿음을 막론(莫論)하고 그 실(實)에 있어서는 모두 불교(佛敎) 유교(儒敎) 기독교(基督敎)를 아울러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사람이 하나님의 계신 줄을 알고 또 하나님과의 사이에 조손(祖孫)의 윤(倫)을 차리는 것을 정륜(正倫)이라 합니다. 사람은 정륜(正倫)을 안 뒤에야 삼재(三才)의 환운동(圜運動)하는 인도(人道)를 알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륜(正倫)의 길을 가르쳐주신 성인(聖人)의 공덕(功德)은 참으로 넓고 큰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없는 세상(世上)은 캄캄한 암흑(暗黑)으로서 그런 세상(世上)에서는 해와 달의 광명(光明)도 한 허영(虛影)에 불과(不過)하며 성인(聖人)의 교화(敎化)를 받지 못한 지대(地帶)는 지금도 미개인(未開人)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四. 사회(社會)의 생장성(生長成)
세 종교(宗敎)의 교리(敎理)는 또한 생명체(生命體)의 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생장성(生長成)의 원리(原理)와 통(通)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萬物)의 생장(生長)하는 자(者)는 무제한(無制限)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오 그 생장(生長)이 어느 한도(限度)에 이르면 반드시 생장(生長)을 멈추고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 변(變)하여 여물게 되는 것이니 역학(易學)에 대과(大過)는 전(顚)한다함이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동식물(動植物)의 각(各) 개체(個體)에 생장성(生長成)의 일생(一生)이 있음과 같이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도 또한 생장성(生長成)이 있으니 불교(佛敎)는 사람이 처음으로 나올 때의 생(生)을 상(象)한 것임으로 살생(殺生)을 경계(警戒)하여 교도(敎徒)들이 소식(素食)을 하는 것이오 유교(儒敎)는 사람이 점점 자라서 생존경쟁(生存競爭)을 하는 때의 장(長)을 상(象)한 것임으로 형벌(刑罰), 무비(武備), 혁명(革命) 등(等)의 일을 흔히 말한 것이오 기독교(基督敎)는 사람의 신명(神明)이 밝아서 하늘로 올라가는 때의 성(成)을 상(象)한 것임으로 주(主)로 영혼(靈魂)에 대(對)한 일을 말한 것입니다.
 
생장(生長)이라함은 만물(萬物)의 운동(運動)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발산(發散)하는 오향운동(外向運動)을 행(行)하는 것이니 초목(草木)의 열매가 터져서 싹이 나오고 줄기에 진액(津液)이 올라가서 꽃과 잎이 피는 것등(等)이 모두 생장(生長)하는 현상(現象)이오 성(成이라함은 생장(生長)하던 물(物)이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써 내향운동(內向運動)을 행(行)하는 것이니 초목(草木)의 열매가 익고 줄기 위에 올라간 진액(津液)이 도로 아래로 내려오는 것등(等)이 모두 성(成)하는 현상(現象)입니다.
 
우리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로써 보면 종래(從來)의 여러 천년(千年)동안은 자체(自體)의 삶을 위(爲)하여 격열(激烈)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 일어나고 세력(勢力)을 가진자(者)가 주위(周圍)에 있는 백성(百姓)들을 정복(征服)하여 스스로 임금노릇을 하고 강대(强大)한 나라들이 약소(弱小)한 나라를 빼앗아서 식민지(植民地)를 만들고 하는등(等)의 생장시운(生長時運)입니다. 물(物)의 생장(生長)은 반드시 상극(相克)을 통(通)하여 행(行)하는 것이오 생장(生長)이 없으면 열매를 맺는 성(成)이 있을 수 없는 것임으로 생장기(生長期)에 생종경쟁(生存競爭)이 있는 것은 불가피(不可避)한 일입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각(各)나라의 민중(民衆)들이 외부(外部)로부터 중심(中心)을 향(向)하여 국가(國家)의 원수(元首)를 선출(選出)하고 전세계(全世界)가 국제연합(國際聯合)을 만들어 장차(將次) 세계단일국가(世界單一國家)를 세울 기세(氣勢)를 보이고 인구(人口)의 과잉(過剩)을 걱정하여 산아(産兒)를 제한(制限)하고 있음과 같은 것은 모두 생장(生長)을 멈추고 성(成)으로 옮겨가는 현상(現象)이라 할 것입니다.
 
또 이 지구(地球)도 종래(從來)에는 내부(內部)의 열(熱)이 외부(外部)로 발산(發散)하여 땅위에 한열(寒熱)의 차(差)가 심(甚)하고 남북극(南北極)의 바다에는 큰 얼음지대(地帶)가 생기고하는등(等)의 생장현상(生長現象)을 나타내더니 지금에 와서는 지구(地球)의 열(熱)이 속으로 들어가서 지온(地溫)이 높아지고 남북극(南北極)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始作)하고 하는등(等)은 또한 지구(地球)의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써 성(成)으로 들어가는 현상(現象)이라할 것입니다. 지구(地球)의 운동(運動)이 종래(從來)의 발산작용(發散作用)으로부터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 변(變)하고 남북극(南北極)의 얼음이 풀리게되면 스스로 조수(潮水)의 왕래(往來)에 변화(變化)를 일으키게되고 조수(潮水)의 변화(變化)가 일어나면 지구(地球)와 달의 운행궤도(運行軌道)에도 또한 변화(變化)가 일어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학(易學)에서는 종래(從來)의 생장(生長)하는 시운(時運)을 선천(先天)이라하고 앞으로 도래(到來)할 성(成)의 시운(時運)을 후천(后天)이라하며 조수(潮水)와 달의 변화(變化)가 일어나는 때를 后天의 첫끝이라 하며 역학(易學)의 복희도(伏羲圖), 문왕도(文王圖), 정역도(正易圖)도 또한 생장성(生長成)의 상(象)을 취(取)한 것입니다.
 
선천(先天)과 후천(后天)의 일이례(一二 例)를 들건대 벌레의 유충(幼蟲)이 생장(生長)하는 동안에는 지면(地面)을 기어다니고 풀이나 나무의 잎을 먹으니 이는 벌레의 선천(先天)입니다. 이것이 점점 자라서 더 자랄 수 없는 한도(限度)에 달(達)하면 몸이 변(變)하여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다시 변(變)하여 성충(成蟲)인 나비가 되는 것이니 이는 벌레의 후천(后天)입니다. 나비는 날개로써 공중(空中)을 날아다니고 그 식물(食物)도 꽃 속의 꿀 같은 것을 먹으니 유충(幼蟲)과 성충(成蟲)이 비록 동일(同一)한 벌레이로되 선천(先天)의 유충(幼蟲)과 후천(后天)의 나비는 그 차원(次元)이 전연(全然)다른 것이며 역학(易學)의 고(蠱)는 이 상(象)을 말한 것입니다. 또 태아(胎兒)가 뱃속에 있는 동안은 전(全)혀 모체(母體)에 의존(依存)하여 머리가 땅쪽을 향(向)하고 귀, 눈, 입, 코가 모두 닫히니 이는 사람의 선천(先天)입니다 태아(胎兒)가 점점 자라서 그 이상(以上) 더 모체중(母體中)에 있을 수 없으면 스스로 궁문(宮門)이 열리며 이 세상(世上)에 나오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후천(后天)입니다. 세상(世上)에 나오면서 귀, 눈, 입, 코가 열리어 딴 천지(天地)를 보게되고 머리의 방향(方向)이 뒤집혀서 하늘을 향(向)하게 되니 궁중(宮中)과 궁외(宮外)는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별(別)다른 세계(世界)이며 역학(易學)에 태궁(胎宮)의 이목총명(耳目聰明)이라 함은 이 상(象)을 말한 것입니다. 선후천(先后天)의 변화(變化)는 차원(次元)을 달리한 별유천지(別有天地)입니다
 
五. 충 효 열의 삼대륜 (忠 孝 烈의 大三倫)
사람이 지도(地道)로부터 인도(人道)로 넘어가서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정륜(正倫)의 길이 있으니 정륜(正倫)의 길은 곧 윤리도덕(倫理道德)의 대종(大宗)인 충효열(忠孝烈)의 대삼륜(大三倫)의 길입니다. 세간(世間)에서는 대삼륜(大三倫)을 귀족사회(貴族社會)의 봉건도덕(封建道德)이라하여 비방(誹謗)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대삼륜(大三倫)은 성인(聖人)이 사회(社會)를 교화(敎化)하기 위(爲)하여 베풀어 놓은 우주생생(宇宙生生)의 대도덕(大道德)이오 귀족계급(貴族階級)을 옹호(擁護)하기 위(爲)함이 아닙니다. 다만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자기(自己)네의 권익(權益)을 위(爲)하여 그것을 악용(惡用)한것 뿐입니다.
 
충(忠)이라함은 나라를 잘되게 하는 일이니 나라가 잘되면 그 속에 있는 개인(個人)도 모두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忠)을 다하는 것은 나라를 위(爲)하는 일인 동시(同時)에 또한 자신(自身)을 위(爲)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와 자신(自身)을 아울러 위(爲)하는 일에 시대(時代)의 구별(區別)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烈)이라함은 부부(夫婦)가 일부일부(一夫一婦)의 도(道)를 굳게 지켜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는 일이니 이 세상(世上)에 어느 남편(男便)이 그 부인(婦人)의 열(烈)함을 원(願)치 아니하는 이가 있으며, 또 어느 부인(婦人)이 그 남편(男便)의 열(烈)함을 원(願)치 아니하는 이가 있으리오 남녀(男女)가 서로 열(烈)을 지킴은 그 상배자(相配者)를 위(爲)하는 일인 동시(同時)에 또한 자신(自身)을 위(爲)하는 일이 되는 것이오 나아가서는 올바른 가정(家庭)에 올바른 자녀(子女)를 기르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효(孝)라함은 자신(自身)의 출생(出生)한 바의 생명(生命)의 뿌리를 건건(健健)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손자(孫子)이오 하나님과 손자(孫子)들과의 사이에는 비록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길고 긴 생명(生命)의 줄이 잇닿아 있으니 이것이 사람의 출생(出生)한 뿌리이며 마치 지구(地球)와 태양(太陽)과의 사이에 큰 인력(引力)이 연결(連結)되어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삼재(三才)의 환운동(圜運動)에는 이 줄로써 원심운동(遠心運動)과 향심운동(向心運動)을 행(行)하고 또 사람의 세데(世代)는 한대(代) 한대(代)씩 늘어나가는데 그 세대(世代)의 늘어나감을 따라서 중심(中心)으로부터의 거리(距離)가 차차(次次)로 변(變)하여 반드시 나선형(螺旋形)으로써 새 궤도(軌道)를 돌게되는 것이니 이 까닭에 사람의 얼굴은 억만인(億萬人)의 억만형(億萬形)으로서 하나도 똑같은 모양(模樣)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손자(孫子)들과의 사이에는 나선형(螺旋形)으로 돌고있는 줄이 있고 그 줄의 중간(中間)에는 역대(歷代) 조상부모(祖上父母)의 여러 마디를 이루고 있어 이것이 그 자손(子孫)들의 촌수(寸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父母)에게 효(孝)를 올려바치면 그것이 이 줄을 통(通)하여 위로 역대조상(歷代祖上)의 마디를 거쳐서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생명(宇宙生命)의 본원(本元)이므로 효(孝)가 위에 올라가는 때에는 환운동(圜運動)의 원리(原理)에 의(依)하여 생명(生命)의 원기(元氣)가 다시 그 자손(子孫)에게로 내려오는 것이니 이것이 곧 생명(生命)의 뿌리가 건건(健健)하게 되는 것이며 역학(易學)에는 이것을 천혜(天惠)가 위로부터 아래에 내리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父母)에게 효(孝)함은 곧 하나님에게 효(孝)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이 자신(自身)에게 생명(生命)의 원기(元氣)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이 까닭에 효(孝)는 부모(父母)를 위(爲)하는 일인 동시(同時)에 또한 자신(自身)을 위(爲)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父母)에게 불효(不孝)하면 자신(自身)과 부모(父母)와의 마음이 반대(反對)되는 양(兩)쪽으로 갈려서 두 사이에 잇닿은 생명(生命)의 줄이 통(通)치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오는 생명(生命)의 원기(元氣)도 또한 자신(自身)에 통(通)치 못하여 한 개(個)의 뿌리 없는 고아(孤兒)가 되는 것입니다.
 
자래(自來)로 불효(不孝)한 집에 생식(生殖)이 창성(昌盛)치 못한 것은 스스로 그 생명(生命)의 줄을 불통(不通)시키는 까닭입니다. 생명(生命)의 줄의 원리(原理)는 태양(太陽)에서 볼 수가 있으니 사람의 생명(生命)의 씨가 태양(太陽)으로부터 나온 까닭에 사람은 잠시(暫時)도 태양(太陽)의 줄을 떠나지 못하고 지구(地球)에 붙어서 쉴 사이 없이 태양(太陽)의 주위(周圍)를 돌고 있으니 그 태양(太陽)을 중심(中心)으로하여 그 주위(周圍)를 돌고 있음은 효(孝)를 올리는 상(象)이 되고 태양(太陽)으로부터 부단(不斷)히 광명(光明)을 받고 있음은 생명(生命)의 원기(元氣)가 돌아오는 상(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효열(忠孝烈)이 어찌하여 윤리도덕(倫理道德)의 대종(大宗)인 삼대륜(大三倫)이 되는가하면 역학(易學)에는 물(物)의 생생(生生)하는 순서(順序)를 말하기를 만물(萬物)이 있은 연후(然后)에 남녀(男女)가 있고 남녀(男女)가 있은 연후(然后)에 부부(夫婦)가 있고 부부(夫婦)가 있은 연후(然后)에 부자(父子)가 있고 부자(父子)가 있은 연후(然后)에 군신(君臣)이 있다하니 이것을 땅위의 생물(生物)의 순서(順序)에 비겨보면 수토(水土)가 있은 뒤에 식물(植物)이 있고 식물(植物)이 있은 뒤에 동물(動物)이 있다함과 같아서 부부(夫婦)는 수토(水土)의 상(象)이되고 부자(父子)는 식물(植物)의 상(象)이되고 나라는 동물(動物)의 상(象)이되는 것입니다.
 
부부(夫婦)의 가정(家庭)은 수토(水土)가 만물(萬物)을 낳고 기르고 함과 같이 아들딸을 낳아서 이 사회(社會)를 이루는 기본조직(基本組織)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감응(感應)하여 기(氣)를 통(通)하여야 생물(生物)이 번성(蕃盛)함과 같이 가정(家庭)은 부부(夫婦)가 화합(和合)하여 감응생활(感應生活)을 하여야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는 것이니 이 감응생활(感應生活)은 반드시 열(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조상(祖上)으로부터 대대(代代)로 이어 내려오는 부조자손(父祖子孫)의 혈연(血緣)은 나무가 점점(漸漸) 자라서 매년(每年) 새 가지를 생(生)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에 년차출생(年次出生)의 순서(順序)가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의 혈연(血緣)에 세대(世代)가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는 그 소자출(所自出)한 뿌리에 햇빛이 비치는 것을 가리워 그의 마르는 것을 싸주고 있으니 이것은 그 가지가 자체(自體)의 생(生)을 위(爲)하여 그 부모(父母)되는 뿌리를 보호(保護)하는 효(孝)입니다.
 
사람의 사회생활(社會生活)은 동물체(動物體)의 각기관(各器官)이 서로 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체내(動物體內)의 각기관(各器官)이 모두 그 맡은 바의 본직(本職)을 지키고 서로 도와서 그 몸을 보전(保全)하는 것은 그 몸에 대(對)한 충(忠)이 되는 것이며 그 몸에 충(忠)하는 것은 또한 스스로 각기관(各器官) 자신(自身)의 생(生)을 위(爲)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烈)의 원리(原理)는 수토(水土)의 감응(感應)에서 나오고 효(孝)의 원리(原理)는 식물(植物)이 그 뿌리를 보호(保護)하는데서 나오고 충(忠)의 원리(原理)는 동물체(動物體)의 각기관(各器官)이 그 통체(統體)를 돕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효열(忠孝烈)은 만물(萬物)의 생생원리(生生原理)가 되고 인간(人間)의 모든 윤리도덕(倫理道德)도 충효열(忠孝烈)로부터 뻗어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손자(孫子)와의 잇는 생명(生命)의 줄은 손자(孫子)들의 효(孝)가 하나님에게로 통(通)하는 길이므로 우리들의 신명(神明)이 위로 통(通)하는 것은 그 형태(形態)의 어떠한 것임을 물론(勿論)하고 모두 효(孝)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충(忠)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對)한 효(孝)가되고 부부(夫婦)가 열(烈)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에 대(對)한 효(孝)가 되고 사람들이 각기(各其) 본직(本職)을 지키는 것도 또한 효(孝)가 되는 것입니다.
 
그 중(中)에서 특(特)히 주요(主要)한 것은 은혜(恩惠)를 잊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출생(出生)한 뿌리가 되는 부모(父母)의 은덕(恩德), 우리를 가르쳐주신 성인(聖人)의 공덕(功德)을 비롯하여 공동(共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은혜(恩惠) 우리의 생활자료(生活資料)가 되는 물물(物物)의 은혜(恩惠)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은혜(功德恩惠)는 지극(至極)히 넓고 큰 것이니 이것을 총칭(總稱)하여 천은망극(天恩罔極)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호일흡(一呼一吸)과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모두 천은(天恩)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은혜(恩惠)를 감사(感謝)하고 잊지 아니하는 것은 효(孝)의 제일보(第一步)입니다.
 
이에 반(反)하여 그 본직(本職)을 지키지 못하거나 배은망덕(背恩忘德)하거나 하는자(者)는 비록 그것이 직접(直接)으로 부모(父母)를 박대(薄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結局) 모두 불효(不孝)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對)한 불효(不孝)는 또한 자기(自己)의 조상부모(祖上父母)에 대(對)한 불효(不孝)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윤리도덕(倫理道德)을 사회(社會) 혈연(血緣) 가정(家庭)의 세 줄로 나눠놓으면 충효열(忠孝烈)이되고 하나님에게로 귀일(歸一)시키면 효(孝)가 되는 것입니다.
 
세 종교(宗敎)의 자비(慈悲), 인(仁), 박애(博愛)는 대체(大體) 누구에게 자비(慈悲)하고 누구에게 인(仁)하고 누구를 박애(博愛)하라는 것인가 하면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계인류(世界人類)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인류(世界人類)는 서로 따로 떨어져있는 사람이 아니오 모두 동일(同一)한 하나님의 손자(孫子)이오 우리들의 밭은(가까운) 촌수(寸數), 는(먼)촌수(寸數)의 형제(兄弟)입니다. 이 땅위의 전인류(全人類)는 비록 살빛이 서로 다르고 언어(言語)가 같지 아니하다 하더라도 모두 한 형제(兄弟)를 이루고 있어 소위(所謂) 동민족(同民族)과 이민족(異民族)의 차이(差異)라는 것은 다만 그 촌수(寸數)의 늘고 밭음과 사돈(査頓)을 맺고 맺지 아니한 차(差)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家庭)에서도 형제(兄弟)가 우애(友愛)하는 것이 부모(父母)에 대(對)한 첫째의 효(孝)가됨과 같이 세계인류(世界人類)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에게 대(對)하여 지극(至極)한 효(孝)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세계인류(世界人類)를 모두 화평(和平)스럽게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업인 까닭입니다.
 
 
六. 사람의 삶
우주(宇宙)의 생생(生生)에는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의 세 도(道)가 있고 또 생장성(生長成)의 세 단계(段階)가 있으므로 사람의 삶에도 또한 이러한 세 가지 형태(形態)가 있는 것입니다.
 
 
一. 사람은 하늘이 이루지 못한 천공(天工)을 대성(代成)하기 위(爲)하여 이 세상(世上)에 난 것입니다.
 
一. 사람은 이땅위의 모든 손자(孫子)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기 위(爲)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一. 사람은 그 신명(神明)이 하늘 땅으로 더불어 환운동(圜運動)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