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화선생 조선역사 중에서>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
이조(李朝)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崇尙)하고 그 외(外)의 학문(學問)은 일체(一切)로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排斥)함으로 학술(學術)의 발달(發達)할 여지(餘地)가 없었다. 산업(産業) 방면(方面)에 있어서는 오직 농업(農業)을 중(重)히 여기고 공업(工業)을 천(賤)히 여기며 혹시(或是) 공업(工業) 기술(技術)이 능숙(能熟)한 자(者)가 있으면 소위(所謂) 양반(兩班)들은 그를 불러다가 임금(賃金)도 변변히 주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사역(使役) 함으로 기술자(技術者)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어서 그 후(後)부터는 그 기술(技術)을 발휘(發揮)치 아니하고 고의(故意)로 조악(粗惡)한 물건(物件)을 만들게되니 그 까닭에 기술(技術)은 점차(漸次)로 퇴보(退步)되고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 국제적(國際的)으로 유명(有名)한 모든 공작물(工作物)이 다시 생산(生産)되지 못하니 유명(有名)한 백제(百濟) 이래(以來)의 조선(造船) 기술(技術)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건축(建築) 조각(彫刻)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 고려(高麗)의 자기(磁器) 제지(製紙) 기술(技術) 등(等)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그러던 중(中) 중국(中國)에서는 명(明)나라 말엽(末葉)에 이태리(伊太利)사람 이마두(伊瑪竇)(마테오 리치)가 북경(北京)에 와서 천주교(天主敎) 당(堂)을 세우고 교리(敎理)와 학술(學術)에 관(關)한 도서(圖書)를 많이 번역(飜譯)하여 낸 뒤로부터 서양(西洋)의 학술(學術)과 기물(器物)이 차차(次次)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中國)을 거쳐 다시 우리 나라에 지래(持來)하게 되었다.
인조(仁祖) 구년(九年) (단기 삼천구백육십사년 신미(辛未))에 정두원(鄭斗源)(호정(壺亭))이 明나라에 갔다가 西洋의 총(銃) 천리경(千里鏡)(망원경) 자명종(自鳴鐘)(시계)등(等)을 가져와서 처음으로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전(傳)하였으며 효종(孝宗) 때에는 김육(金堉)이 북경(北京)의 흠천감(欽天監)에 사람을 보내어 서양(西洋) 역법(曆法)을 배워다가 효종(孝宗) 사년(四年) (계사(癸巳))부터 시헌역(時憲曆)을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직접(直接)으로 채용(採用)한 시초(始初)이었다.
서양(西洋)의 천주교(天主敎)는 선조(宣祖)때에 중국(中國)을 거쳐서 들어온 형적(形迹)이 있고 인조(仁祖)때로부터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秘密裏)에 민간(民間)에 유포(流布)되고 있었다. 원래(原來) 종교(宗敎)의 포교(布敎)에는 교리(敎理) 이외(以外)에 다른 학술(學術) 공예(工藝) 등(等)을 수반(隨伴)하여 와서 교리(敎理) 선전(宣傳)의 힘을 돕는 것이다. 그 까닭에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불교(佛敎)가 들어올 때에 여러 가지 기술(技術)이 반래(伴來)하고 천주교(天主敎)의 포교(布敎)에도 서양(西洋)문물(文物)의 전래(傳來)가 간접적(間接的)으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의 학술(學術)과 공업(工業) 기술(技術)에 이색(異色)이 섞이게 되었다.
서양(西洋)사람으로서 직접(直接)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는 선조(宣祖)때에 제주도(濟州道)에 표착(漂着)한 마리이(馬里伊)(포르투칼 사람..)를 비롯하여 인조(仁祖)때에는 화란(和蘭)(네델란드)사람 삼인(三人)이 표착(漂着)하여 왔고 그 중(中)에서도 박연(朴淵)은(벨테브레)은 대포(大砲)를 만드는 기술(技術)이 있고 우리 나라 사람에게 장가를 들어서 살았으며 효종(孝宗)때에는 역시(亦是) 화란(和蘭)사람 하멜등(等)(여수시 바닷가에 하멜공원이 있음) 삼십육(三十六)인(人)이 표류(漂流)하여 와서 십사년(十四年)동안 우리 나라에 구류(拘留)되어 있다가 그 중(中)에서 「하멜」등(等) 육인(六人)이 일본(日本)의 장기(長崎)로 도망(逃亡)하여 그곳에서 본국(本國)에 돌아갔다. 「하멜」이 우리 나라에 관(關)한 책(冊)을 지어내니 서양(西洋) 사람의 손으로 우리 나라가 세계(世界)에 소개(紹介)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외국(外國) 무역(貿易)은 전(前)에는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국가(國家) 재정(財政)을 보족(補足)하기 위(爲)하여 통상(通商)에 힘쓰고 거기에 필요(必要)한 시설(施設)을 하였다. 일본(日本)에 대(對)하여는 부산(釜山) 왜관(倭館)을 물이 깊은 초량(草梁)으로 옮기고 선박(船舶)의 왕래(往來)를 편리(便利)하게 하고 청(淸)에 대(對)하여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의 무역(貿易)을 정기적(定期的)으로 개설(開設)하게 하고 동부(東部) 만주(滿洲)에 대(對)한 회령(會寧) 개시(開市)에도 그때 그때의 적당(適當)한 변통(變通)을 더 하였다. 의주(義州)에서 청인(淸人)의 생사(生絲)를 들여오고 부산(釜山)에서 일본(日本)의 은(銀)을 받아다가 다시 두 나라에 전매(轉賣)하여 그 이익(利益)을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에 보태었고 또 인삼(人蔘)의 수출(輸出)도 적지 아니 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남양(南洋) 방면(方面)의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섬라(暹羅)(동남아시아 샴, 타이) 유구(琉球)(오끼나와)등(等) 여러 나라가 자주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오더니 그 후(後)에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의 해상(海上)에는 왜구(倭寇)의 작폐(作弊)가 심(甚)하여 남양(南洋) 사람들의 직접(直接) 통항(通航)은 끊어지고 그 대신(代身)에 해상(海上) 무역(貿易)으로써 유일(唯一)한 생계(生計)를 삼는 유구(琉球)사람들이 남해(南海) 일본(日本) 조선(朝鮮)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중계무역(中繼貿易)의 이(利)를 취(取)하였다.
이러한 관계(關係)로써 유구(琉球)는 우리 나라에 내왕(來往)이 많고 성종(成宗)때에 가장 빈번(頻繁)하였고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로 차차(次次) 드물어졌다. 그네들은 대개(大槪) 섬라(暹羅) 안남(安南)(베트남) 남양군도(南洋群島)(괌,싸이판지역)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등(等) 남국(南國)의 물자(物資)를 직접(直接) 또는 중국(中國) 경유(經由)로 받아다가 일본(日本) 박다(博多)(규슈)에서는 일본(日本)상인(商人)에 넘기고 우리 나라 삼포(三浦)로 와서는 주(主)로 면포(綿布)와 교역(交易)하여 한번에 수천(數千) 내지(乃至) 수만여필(數萬餘疋)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으니 이때의 일본(日本)이나 유구(琉球)는 아직 목면(木棉) 재배(栽培)를 몰라서 일국(一國)의 수요(需要)를 우리 나라에서 가져다가 공급(供給) 하였음으로 우리 나라 면포(綿布)는 국제(國際) 통화(通貨)로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고 있었다. 인조(仁祖)때에 유구(琉球) 왕(王)이 일본(日本)에 잡혀간 일이 있는데 왕자(王子)가 부왕(父王)을 속(贖)하고자 하여 여러 가지 보화(寶貨)를 배에 싣고 일본에 가다가 바람에 표류(漂流)되어 제주도(濟州道)에 내박(來泊)하였다. 그때 제주도(濟州道) 목사(牧使)는 그 보화(寶貨)를 탐내어 취(取)하려 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 함으로 불법입국(不法入國)하였다는 죄명(罪名) 하(下)에 사형(死刑)에 처(處)하니 왕자(王子)는 부왕(父王)도 속(贖)하지 못하고 아무 죄(罪)없이 이역(異域)에서 죽는 것이 하도 원통(寃痛)하여 보화(寶貨)를 해중(海中)에 집어넣고 글 한 수(首)를 짓고 형(刑)을 받으니 이것이 유구(琉球)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 최후(最後)이었다.
堯語難明桀服身 三良入地人誰贖
臨刑何暇訴蒼旻 二子乘舟賊不仁
骨曝沙場纏有草 竹西樓下滔滔水
魂歸故國弔無親 遺恨分明咽萬春
堯話도桀服身이 밝히기 어렵고
세사람 묻히니 누가 贖하리오
刑에 臨하여 하늘에 호소할 겨를도 없네
二子乘舟에 적은 어질지 못하네
뼈는 모래밭에 딩굴고 풀마저엉킬터
魂은 고국에 돌아간들 조문할 친척 없네
죽서루아래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유한 오열은 분명 만년 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