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6.

韓國的主體性의 確立과 使命

三和 韓長庚 (1960)
韓國的主體性의 確立과 우리들의 使命 
사람은 한個의 獨立된 生命體이므로 自體의 生活이 自體에 依하여 自主化한 然後에 時代의 變遷함을 따라서 그 生活을 그에 適應케하여 늘 아름답게 하고 늘 새롭게 하면서 向上發展시킬 수가 있는 것이니, 生活의 自主化가 곧 自體의 主體性이다. 個人에게 主體性이 있음과 같이 여러 個人의 集團生活體인 國家에도 또한 主體性이 있는 것이오 國家에 主體性이 있은 然後에 그 國家生活을 向上發展시킬 수가 있는 것이니, 이 까닭에 우리 韓國에도 韓國的主體性의 確立이 切實히 要求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主體性은 무엇으로써 세우는가 하면, 사람一身의 耳目口鼻 手足等의 動作은 그들의 任意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精神의 命令에 依하여 計劃的으로 움직여서 그 生存을 營爲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精神이 그 主體가 되는 것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國家의 모든 活動도 반드시 그 活動을 自主할만한 中心思想이 서서 計劃的으로 國家의 生存을 營爲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主體性確立問題에 있어서도 國家를 늘 아름답게하고 늘 새롭게하여 一層向上發展시킬 수 있는 中心思想이 먼저 確立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國家의 中心思想이 서지 못하면 이 思想 저 思想이 서로 맞서서 思想의 混亂이 일어나는 것이니, 思想의 混亂은 政治混亂이나 經濟混亂보다도 더 危險하여 國家의 生存을 危殆롭게 하는 것이다.
國家의 主體性을 세우기 爲한 思想은 무엇을 그 內容으로 하여야 하는가 하면 거기에는 다음 세 가지의 作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思想自體의 成立이니 思想은 國家의 生存을 營爲하는 主體가 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人間性의 本然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 것이오 사람들의 尊嚴性이나 生存權을 侵害함과 같은 獨裁, 專制等 思想은 人間性의 本然에 어그러지는 것이다. 
둘째로 思想의 空間的 相通이니, 國家는 孤立하여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오 世界各國과 平和的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므로 그 思想은 반드시 人類가 共通的으로 所有하는 것이어야 하며 홀로 尊大, 獨善함과 같은 國粹, 排他等 思想은 國家의 地位를 孤立시키는 것이다. 
셋째로 思想의 時間的繼續이니, 思想은 人間의 生理에 맞고 그 血管속을 끊임없이 흘러서 國家를 이끌고 나갈만한 原動力이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思想은 永續性을 가지고 本體는 굳세게 있으면서 그 作用은 時代의 變遷함을 따라서 隨時로 變通하여 時代에 맞춰서 社會를 나날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 氣分的으로 感受하였거나 卽興的으로 造作하였거나 함과 같은 思想은 國家를 이끌고 나갈만한 힘도 없고 또 繼續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思想의 自體成立, 空間的相通, 時間的繼續은 세가지 作用이 한 體로 되는 것이니, 이는 어떠한 生命體이든지 그 生命體에는 반드시 自體運動의 作用과 空間的으로 長成하는 作用과 時間的으로 永續하는 作用과의 세 作用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思想은 <三用이 一體>가 된 然後에 能히 自體의 힘으로서 自體의 生存을 營爲하여 國家의 主體性을 세우는 思想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思想의 세 作用은 어떻게 하여 成立되는 것인가 하면, 이것을 알기 爲하여는 먼저 사람은 어디에서 出生하고 무엇을 하기 爲하여 이 世上에 살고있는가, 즉 人生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生命을 가지고 있는 모든 生命體는 自體의 生命이 生存하기 爲하여 반드시 自體의 生存을 營爲함에 必要한 精神作用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사람도 또한 그 生命이 生存하기 爲하여 그 生存을 營爲함에 必要한 精神作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生命과 精神은 서로 不可分의 關係를 가지고 一物의 兩面作用이되어 生命의 있는 곳에 반드시 精神이 있고 精神의 있는 곳에 반드시 生命이 있는 것이다. 
모든 生命體의 精神作用은 그 體의 組織에 適應하여 各各 程度의 差異가 있으니, 蟲魚에는 蟲魚의 組織體에 適應한 精神이 있고 鳥獸에는 鳥獸의 組織體에 適應한 精神이 있어, 그 體의 組織이 複雜할수록 그 精神이 또한 發達하며, 사람은 모든 生物中에 그 體의 組織이 가장 複雜하므로 그 精神이 가장 靈異하여 過去를 記憶하고 未來를 推想하여 意識的으로 計劃을 세워서 能히 온갖 天然物에 人工을 加하여 生活資料로 쓰고 能히 社會를 組織하여 共同生活을 營爲하고 있으니 이는 사람의 體의 組織이 複雜한 까닭에 또한 그와 같은 靈異한 精神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宇宙의 組織은 얼마나 複雜한가 하면 宇宙의 일은 그만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地上의 일로만 보더라도 地上에 가득히 차 있는 植物 動物등 生物을 비롯하여 모든 生物의 生存에 直接 間接으로 여러 가지 作用을 加하고있는 太陽, 地球, 달, 水火같은 것도 모두 生命體이오 日月 地球 水火等이 모두 生命體인 까닭에 거기에서 動植物等 生物이 生長하는 것이며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無形한 電氣 磁氣 空氣等 모든 氣體도 또한 生命體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生命의 없는 곳에서는 生物이 生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宇宙間의 모든 生命體는 서로 有機的으로 聯關되어 하나도 孤立獨存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宇宙는 하나의 統一的 有機的 生命體이다. 
生命이 있는 곳에 반드시 精神이 있는 것이오 精神의 發達程度는 體의 組織에 適應하는 것이라 組織의 가장 廣大하고 가장 複雜한 宇宙生命體에 반드시 想像조차 할 수 없는 靈異한 精神이 있을 것은 可히 推知할 수 있는 것이다.
高等動物과 사람과의 身體組織에는 큰 差異가 없는 듯 하되 그 精神作用에 있어서는 全然 次元이 달라서 動物은 主로 本能生活을하고 있으되 사람에게는 動物들의 想像조차할 수 없는 靈異한 精神이 있어 理性을 가지고 意識的으로 計劃을 세워서 그 生活을 營爲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宇宙生命體 속의 極少한 一部分이로되 能히 이런 靈異한 精神作用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宇宙를 有機的으로 統一하고 있는 宇宙生命體의 精神作用은 또한 사람과는 全然 次元을 달리하여 사람으로는 到底히 想像할 수 없는 精神作用을 가지고 意識的 計劃的으로 宇宙生命體의 生存을 營爲하고 있는 것이니, 이 宇宙生命體의 精神을 이름하여 神이라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神이라함은 宇宙를 統一하고 있는 唯一神이오 意識을 가지고 있는 人格的 神이다.
 
宇宙生命體는 그 한 面은 生命의 作用이되고 다른 한 面은 精神 卽 神의 作用이 되는 것이므로 宇宙의 생기는 때에 神이 함께 생겨서 宇宙의 始初가 곧 神의 始初이다. 生命과 神은 모두 無形하고 無形에서 有形한 物質을 生하는 것이 곧 創造이니 그러므로 生命과 神은 宇宙의 原體이오 創造된 것이 아니며, 宇宙의 原體에서 運動하는 힘이 곧 生命이오 運動을 일으키는 힘이 곧 神이다. 生命과 神과의 關係는 사람의 肉體와 精神과의 關係와 같으니, 사람의 精神은 그 生存에 對한 計劃을 세우고 肉體에 對하여 그 作業을 命令하는 것이오 精神이 直接 作業하는 것은 아니며 神도 그러하여 神은 萬物의 生存에 對한 計劃을 세우고 生命을 시켜서 創造作業을 實踐케 하는 것이오 神이 直接 創造作業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宇宙創造의 經路를 生命의 運動으로써 보건대, 生命은 自體의 生存을 爲 하여 不斷히 運動치 아니하면 안되는 것이오 生命의 運動이 일어나면 生命과 物質의 中間性을 띤 無形한 氣體가 새로 생기는 것이니, 이 氣體가 곧 電氣와 磁氣이며, 電氣와 磁氣는 無形에서 有形을 生하는 中間體이다. 

生命의 運動에서 電氣와 磁氣가 生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物을 構成한 最小單位인 原子가 電氣로되고 電氣의 있는 곳에 반드시 磁氣가 있기 마련이니, 原子에는 電氣와 磁氣가 있는 것이며 太陽系宇宙의 中心이 되고 있는 太陽에 또한 電氣와 磁氣가 있으므로 太陽光波와 電波의 運動法則이 同一하고 太陽에 磁場風이 있으니, 地上風의 流行하는 原動力도 또한 太陽에 있는 磁氣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太陽系의 宇宙 안에서 最小構造인 原子와 最大構造인 太陽이 모두 電氣와 磁氣로서 構成되어 있으므로 宇宙間 萬物의 構造도 모두 電氣와 磁氣로써 基本을 삼고 있을 것을 可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生命의 運動이 일어나는 때에 最初로 生한 것이 곧 生命과 物質의 中間에 있는 非生命 非物質의 氣體, 卽 電氣와 磁氣라고 생각한다.  

電氣와 磁氣는 서로 不可分의 關係를 가지고 宇宙의 大氣中을 流行하면서 自體가 生存하기 爲하여 卽 自體가 有形化하여 創造되기 爲하여 不斷히 運動을 行하고 있는데, 大氣中에서 電氣의 陰陽 두 作用이 서로 衝激하면 電火를 發하며, 大氣가 零下二百餘度로 冷却하여 壓縮되면 水液을 生하니, 水火의 生한 것이 宇宙有形의 始初이다. 그러나 電火는 發하는 卽時로 消滅하여 形을 이루지 못하며, 水液은 그대로 形質을 이루니, 그러므로 無形에서 最初로 有形이 生한 것은 水이며 水의 形이 生한 然後에 火가 水液의 形質에 依附하여 形을 이루어 光明을 生한 것이니 神도 水火를 生한 然後에 비로소 有形한 運行을 하는 것이며 이가 生命의 運動에 依하여 無形이 有形으로 創造되는 徑路이다. 

生命의 創造作業은 神의 意識的 計劃에 依하여 行하여지는 것인데 神은 無形하여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직 生命의 運動만이 表面에 나타나서 宇宙의 大自然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自然法則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自然法則이라 함은 生命의 萬物創造作業을 말한 것이오 또한 神의 計劃한 設計圖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宇宙萬物의 創造를 神의 意識的計劃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宇宙間의 森羅한 萬物은 至極히 繁多하고 至極히 錯雜하되 모두 秩序整然한 運動으로써 그 生存을 營爲하여, 어느 一物도 그 生存作用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없고 또 萬物의 相互間에는 相互克制와 相互扶助의 作用이 自然스럽게 行하여 모두 調和된 狀態로써 그 生存을 完遂하고 있으니, 이는 萬物이 여기저기에서 偶然忽然히 單獨的으로 생겨서 各自 獨自的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系統의 法則밑에서 有機的으로 서로 聯關되고 統一되어, 어느 一物도 이 有機的系統의 테두리 밖에서 單獨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宇宙間萬物은 空間的으로는 有機的 統一的으로 서로 連結되어 있고, 時間的으로는 同一히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法則에 依하여 永續不絶하는 運行을 하고 있으니, 이는 宇宙生命體의 精神인 神이 至精至妙한 計劃으로써 萬物을 創造한 것이다. 

사람은 宇宙의 一部分밖에 되지 아니하되 그 生存을 營爲함에 있어서, 잘되었건, 못되었건, 반드시 먼저 計劃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서 事業을 進行하는 것인즉, 宇宙生命體의 生存을 營爲하는 神은 萬物을 하나도 빠짐없이 生存시키기 爲 하여 宇宙의 大空間에 가득히 차 있는 萬物의 微物細菌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周知치 못함이 없고, 또 萬物을 永遠히 繼續 生存시키기 爲하여 萬物의 生生發展하여 나가는 宇宙의 大時間의 無窮한 未來를 先知치 못함이 없고, 또 萬物에게 各自의 生存法則을 賦與하여 어느 一物도 그 生存을 完遂치 못함이 없게하는 能力이 있으니, 神은 이러한 知能으로써 物의 創造計劃을 세우는 것이오,이 計劃을實踐하는 것이 곧 自然法則이다. 우리 人間도 神의 創造計劃에 依하여 創造된 것이므로 神의 精神作用의 一部分을 稟受하여 自體의 精神을 삼고 있으니 人間의 靈異한 意識, 理知, 計劃같은 것은 모두 神으로부터 받아온 것이며, 저 宇宙에 없는 靈異한 精神을 人間만이 홀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人間의 創造되기 以前에 이미 宇宙에는 生命과 함께 神이 있어 萬物을 創造한 것이오 사람이 생겨서 生命을 받는 때에 또한 神의 精神作用을 함께 받은 것이다.
그런데 生命은 그 運動을 通하여 有形化 하고 있는데 神이 홀로 有形化하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면, 이는 사람의 精神의 無形함과 同一한 理이다. 사람의 精神이 無形한 까닭에 能히 無限한 空間을 周行하면서 萬事萬物을 接應하고 또 能히 無窮한 時間의 過去를 記憶하고 未來를 推想하여 모든 生存計劃을 세우는 것이니, 만일 사람의 精神이 形體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어느 한 器官으로 局限되어 그 器官의 맡은바의 任務 以外에는 全혀 캄캄하여, 마치 눈이 아무리 밝아도 보는作用 以外에는 다른 쓸곳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精神의 所自出한 神도 또한 그러하여 無形한 까닭에 能히 無限無窮한 空間과 時間을 統一하여 萬物을 有機的으로 創造하고 또 永遠히 繼續生存케 하는 것이다.
우리 사람은 神에서 生하여 神의 子孫이 되고 있는데, 神은 무슨까닭에 사람을 生하였으며, 또 사람은 무엇을 하기 爲하여 살고 있는가?
宇宙의 生存은 永遠不窮한 것이오 生存의 永遠不窮한 것은 宇宙의 運動이 循環運動으로 되어 끝이 없는 까닭이다. 만일 宇宙의 運動이 直線運動으로 되면, 直線運動은 終了하는 곳에서 다시 始作하지 못하므로 어느때 어느곳에서든지 반드시 運動이 中止되어 生存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의 살고있는 이 地球가 圓狀의 軌道로써 太陽의 周圍를 돌아서 空間的으로 循環運動이 될 뿐만 아니라 空間의 循環運動은 또한 時間의 循環運動으로 되어 每年에 春夏秋冬이 反復하고 每月에 晦朔望弦이 反復하고 每日에 晝夜朝夕이 反復하며 草木이 열매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 꽃이 피고 꽃이 다시 열매를 맺으며, 虫類가 알에서 幼虫이 나오고 幼虫이 成虫으로 되고 成虫이 알을 낳고 하는것等이 모두 循環運動이니, 모든 生物은 어떠한 形態로든지 반드시 循環運動을 行하는 까닭에 그 生存이 永遠不窮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닭이 먼저 나왔느냐 닭알이 먼저 나왔느냐」하는것도 宇宙의 循環運動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이 神의 創造에 依하여 出生한 以上, 반드시 어떠한 形態로든지 神에게로 돌아간 然後에 循環運動이되어 그 生存이 永遠不窮한 것이며, 닭이 알을 낳고 알에서 닭이 나오는 것과 같이 神에서 萬物이 나오고 萬物이 神을 닮고 하는 것이 곧 神과 萬物의 사이에 行하는 循環運動이다. 그러나 神은 無形하니 萬物이 어떻게 神을 닮는가하면, 神이라함은 宇宙生命體의 精神을 말한 것이므로 萬物의 精神이 神의 形狀과 一致하는 것이 곧 萬物이 神을 닮는 것이며, 萬物中에 그 精神이 神의 形狀을 닮을 수 있는者는 오직 사람이다. 卽 사람의 精神만이 神의 形狀을 닮아서 神으로 더불어 循環運動을 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動物에도 精神이 없는 것은 아니나 動物의 精神은 神을 닮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과 動物은 그 發生當時에 體의 組織을 달리한 까닭에 그 精神도 또한 次元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生物의 組織은 宇宙의 蒼生最初에 처음으로 有形化한 水火를 體로하고 있는데, 火의 性은 위를 向하여 올라가는 것이므로 불길은 반드시 直立하여 縱으로 天을 向하는 것이오 水의 性은 아래를 向하여 내려가는 것이므로 물의 흐름은 반드시 누어서 橫으로 地의 낮은 面을 向하는 것이라, 사람의 體는 水火가 調和되어 水火의 作用이 倂行하므로 그 身體는 불길과 같이 直立하여 天을 向하면서 두 발은 땅을 밟아서 三角形으로써 天地를 直結하며, 水의 性은 透明하고 火의 性은 光明하므로 사람의 精神은 水의 透明作用과 火의 光明作用으로써 마음의 聰明을 發하며, 火氣가 發揚하여 몸이 直立하므로 손을 써서 手工을하고 입을 열어서 言語를 發하며, 言語와 手工이 있는 까닭에 文字를 發明하여 敎育制度가 생긴 것이니, 敎育은 萬物中에 오직 人類만이 가지고 있는 特權이다.
動物의 體는 水氣가 火氣보다 많은 까닭에 水가 地面을 橫으로 흐르는 것과 같이 動物의 몸은 반드시 橫하여 등이 天을 向하고 배가 地를 向하며, 火氣가 적은 까닭에 言語를 發치 못하고 光明이 밝지 못하여 精神이 어두우며 生物들의 家族系統을 보더라도, 사람은 火의 縱과 水의 橫이 아울러 있으므로 사람의 家族은 위의 祖上父母로부터 아래의 子孫에 이르는 縱系族屬과 夫婦 兄弟의 橫系族屬과의 兩系가 同居하여 사람이 그 所自出한 神을 父祖로 모시는 것도 또한 縱系의 한 形態이며, 動物은 그 體가 橫하므로 그 새끼를 乳養하는 期間以外에는 縱系族屬이라는 것이 없고 오직 雌雄이 相從하는 橫系만이 있는 것이다. 

萬物中에 사람의 精神만이 神을 닮을 수 있고 植物이나 動物은 神을 닮을 수 없는 것이므로 神은 사람을 生하여 사람의 無形한 精神으로하여금 無形한 神의 形狀을 닮게하여 神과 사람이 함께 循環運動을 行하여 永遠不窮한 生存作用을 營爲하려 하는것이오 사람은 神을 닮아서 宇宙의 永遠不窮한 生存作用의 一役을 맡기 爲하여 이 世上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人間의 靈貴하고 尊嚴한 所以이오 神의 事業이라함은 사람을 生養하는 일이다. 卽 사람을 生養하는 일이 神의 事業의 最大目標이다. 그런데 植物이나 動物은 神을 닮을만한 精神이 없어서 神과의 사이에 循環運動이 行치 못하니, 이것은 直線運動이 되지 아니하는가 하면, 여기에도 循環運動의 形態가 있다.
神이 사람을 生하여 養育함에는 반드시 그 生養資料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가 이른바 食物連鎖의 法則이다. 

이 法則에 依하여 神은 먼저 植物을 生하고 다시 그 植物을 生養資料로하여 한 次元의 높은 動物을 生하고 또 다시 植物과 動物을 生養資料로하여 더 한 次元의 높은 사람을 生하고 이에 사람으로 하여금 神을 닮게 한 것이다. 이것을 植物이나 動物의 處地로써보면 植物은 그 精神이 神을 닮지 못하는 것이므로 自體의 形質을 犧牲하여 神에게 바쳐서 윗 次元의 動物의 形質로 化하고, 動物이 또한 自體의 形質을 犧牲하여 神에게 바쳐서 윗 次元의 사람의 形質로 化하니 이는 모든 生物이 一聯이 되어 自體의 犧牲에 依하여 한 次元씩 올라가서 神을 닮는 作用을 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動植物을 犧牲하여 自體를 生養하고 그 精神이 神을 닮아서 神으로 더불어 循環運動을 行한 然後에야, 自體를 犧牲하여 사람을 生養하고 있는 動植物에 對하여 그 恩德을 報答하는 것이 되며 또 植物이나 動物도 自體를 犧牲함에 當하여 神을 닮을만한 精神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求하여 그 사람의 形質로 化하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宇宙의 生存法則이다. 사람이 植物動物을 犧牲하여 自體를 生養하면서 그 精神이 神을 닮지 못하면 이는 無故殺生을 하는 慘酷한 일이며, 또 植物動物이 神을 닮지못하는 사람의 몸을 爲하여 自體를 犧牲하면 이는 보람 없는 헛 犧牲을하는 슬픈일이다. 

사람의 精神은 神의 形狀을 닮고 있으므로 神이 萬物을 創造하는 知能이 있음과 같이 사람에게도 小部分이나마 創造의 才能이 있는 것이다. 動物의 生活은 그 食料같은 것도 水土에서 生하는 天然物을 아무런 加工도 없이 그대로 먹고 그 工作物이라고는 거미의 그물, 새들의 둥우리, 버리의 집(벌), 개아미의 窟(개미)等 程度에 不過한 것이며, 사람의 生活은 天然物을 그대로 쓰는 것은 거의 없어서, 食料같은 것도 果實以外에 어느 하나도 加工치 아니한 것이 없고 自然水는 到處에 있는 것이로되 사람의 集團하여 사는 곳에서는 自然水를 그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므로 飮用水는 반드시 새암을 파서 먹으며, 衣服 家屋 日用器具 같은 것도 天然物로 存在하는 것은 거의 없으므로 반드시 人工을 들여서 製作하며 共同生活을 營爲함에 必要한 規定같은 것도 天然的으로는 全然 存在치 아니하므로 사람이 宇宙의 自然法則을 본 받아서 制定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精神이 神을 닮아서 物을 創造하는 才能이 있으므로 天工의 未成한 것을 사람의 人工이 代行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資料를 삼는 것이다.
사람이 人工으로써 사람을 生養하는 일을 營爲하는 것은 神의 事業을 돕는 것이오 神의 事業을 돕는 것이 곧 神을 닮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生養하는 일은 大小를 勿論하고 모두 神의 事業을 돕는 일로서 이 世上에는 사람을 生養하는 일보다 더 큰 事業이 없고 人間社會의 政治같은 것도 그것이 사람들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營爲되는 것 같으나, 그 實은 모두 神의 營爲하는 事業으로서 天工의 未成한 것을 사람이 人工으로써 神의 뜻을 받들어서 代行하는 것이다. 社會의 財貨같은 것도 그것이 所有한 者의 私有物 같으나 그 所有者는 神의 뜻을 받들어서 그 財貨의 管理者가 되어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에 쓰라는 것이오 管理者 個人의 豪遊資料로 消費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政權을 잡은 者자는 神의 뜻을 받들어 民衆을 生養하는 代行者이오 財貨를 所有한 者는 그 財貨를 사람의 生養에 쓰는 管理者이니, 代行者 管理者가 神의 뜻에 맞도록 그 事業을 하는 때에 그 사람의 精神이 神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오 代行者 管理者가 神을 닮는때에 이 地上에는 神의 뜻에 合하는 天國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가 지금 바래고 求 하는 바의 思想은 바로 神의 뜻에 合하는 地上天國을 建設한다는 思想이다. 

神의 뜻에 合하는 思想이라 함은 사람이 神으로 化한다는 神化思想이니 神化思想은 사람을 生養하는 것을 主旨로 하는 것이므로 空間的으로는 世界人類의 共通한 것이오 時間的으로는 宇宙의 生存과 함께 永久繼續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 韓國의 建國史는 神化思想에서 出發하니 檀君古記에 나타난 神市의 神人政治도 神化思想을 말함이오. 扶餘의 國民들이 水旱이 고르지 못하여 凶年이 드는때에 그 허물을 國王에게 돌리는 것도, 國王은 天의 뜻에 合하는 政治를 行하여 豊年이 들게하여 國民을 生養하는 責任이 있다하는 神化思想에 依한 것이오, 新羅에서는 임금을 次次雄이라 하였는데 次次雄은 方言에 巫라는 뜻이오 巫는 神을 섬기는 사람을 말함이라 新羅國王이 神의 뜻을 받들어서 政治를 行하므로 이것을 巫라 한 것이니, 이것도 또한 神化思想에 依한 것이며, 李朝때에 나라에서 定한 國歌에 「하나님이 保護하사 우리나라 萬歲」라고 한 것도 決코 偶然한 것이 아니오 우리의 生理에 맞아서 四千餘年間 우리의 血管속을 흘러내려 오는 神化思想의 傳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神의 뜻에 根據하고 四千年來의 傳統을 살려서 이 地上에 天國을 建設한다 하는 神化思想을 가지는 것이 곧 韓國的主體性을 確立하는 所以라고 생각한다. (1960年代)

2014. 5. 16.

역학으로본 사람의 세상살이 <한삼화선생>


역학(易學)으로 본 사람의 세상(世上)살이
一. 사람은 광명(光明)에서
二. 사람의 尊嚴性
三. 세 종교(宗敎)는 삼도일체(三道一體)
四. 사회(社會)의 생장성(生長成)
五. 충 효 열의 삼대륜 (忠 孝 烈의 大三倫)
六. 사람의 삶
一. 사람은 광명(光明)에서
 
우리들 사람은 우주통체(宇宙統體)의 한 분신(分身)을 받아 이세상( 世上)에 태어나고 우주통체(宇宙統體)에는 사람을 창시(創始)하신 주재자(主宰者)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주재자(主宰者)를 하나님이라 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한 처음의 시조(始祖)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사람의 시조(始祖)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시(創始)하신 우주(宇宙)의 대시조(大 始祖)이십니다. 역학(易學)에 천지만물(天地萬物)에는 췌취(萃聚), 감응(感應), 항구(恒久)의 세 가지 정(情)이 있다 한바 이 세 가지 정(情)은 곧 생장(生長), 생식(生殖), 장수(長壽)의 세 가지 본능(本能)이니 천지만물(天地萬物)에 모두 똑같은 본능(本能)이 있다는 것은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모두 동일(同一)한 조상(祖上)에서 나온 까닭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학(易學)에는 우주(宇宙)의 주재자(主宰者)를 상제(上帝)라하고 또 상제(上帝)를 조고(祖考)에 배(配)한다하여 이 두 가지의 뜻을 합(合)쳐서 천조상제(天祖上帝)라고 부르고 있으니 천조상제(天祖上帝)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주간(宇宙間)에 존재(存在)하는 만물(萬物)은 모두 살아있는 생명체(生命體)입니다. 무생물(無生物)같이 보이는 해, 달, 땅 같은 것도 모두 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생장성(生長性)의 운동(運動)을하고 있으니 생장성(生長性)의 운동(運動)을하는 그 현상자체(現象自體)가 이미 살아있다는 사징(事徵)입니다. 그러므로 역학(易學)은 이 천지(天地)를 모두 생명체(生命體)로보고 그 생명체(生命體)에는 만물(萬物)을 묘(妙)하게하는 신(神)이 있어 만물(萬物)을 낳고, 기르고, 여물게 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生命體)에는 반드시 자체(自體)가 생생(生生)함에 필요(必要)한 신명(神明)(정신작용精神作用)이 있으니 만일 이 신명(神明)이 없으면 생명체(生命體)는 그 생(生)을 완수(完遂)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지각(知覺)하고 기억(記憶)하고 사고(思考)하고하는 신명(神明)이 있고 모든 동물(動物)들도 정도(程度)의 차(差)는 있으나 모두 얼마만큼의 신명(神明)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한 분신(分身)인 사람에게 이와 같은 신명(神明)이 있다고 하면 우주(宇宙)의 통체(統體)에도 사람과 같이 지각(知覺), 기억(記憶), 사고(思考)의 작용(作用)을 행(行)하는 신명(神明)이 있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는 일이오 이 통체(統體)의 신명(神明)이 곧 하나님의 신명(神明)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람의 몸은 우주통체(宇宙統體)의 일부(一部)를 나눠 가진 것이오 사람의 신명(神明)은 하나님의 신명(神明)의 일부(一部)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肉體)라는 몸 덩어리가 있고 이 몸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신명(神明)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통체(宇宙統體)는 해, 달, 땅등(等) 천체(天體)를 비롯하여 땅위에 있는 온갖 물체(物體)를 모두 합(合)쳐서 한 몸 덩어리로 하고 그 우주(宇宙)의 몸 덩어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주간(宇宙間)의 이러한 온갖 물체(物體)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되 결(決)코 낱낱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오 소위(所謂)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는 큰 힘으로써 서로 연결(連結)되어 한 몸 덩어리로 되고 있으니 역학(易學)에 천하(天下)의 움직임은 늘 일(一)하다 함이 곧 이것입니다. 생물체(生物體)의 신명(神明)은 그 몸 덩어리의 구조(構造)에 적응(適應)하여 깃들이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몸 덩어리는 엄청나게 큰 것임으로 거기에 깃들여 있는 신명(神明)도 또한 엄청나게 큰 하나님의 신명(神明)이십니다. 또 사람은 그 한 몸의 속에서 비록 조그마한 피부(皮膚) 한 점이라도 지극(至極)히 사랑하여 혹시(或是)나 상해(傷害)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그 몸의 어떠한 부분(部分)에 대(對)하여도 사랑치 아니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한 몸 덩어리로 하고 있는 하나님은 비록 일초일목(一草一木) 일충일어( 一虫一魚)라 하더라도 모두 한결같이 사랑하여 그의 생(生)을 완수(完遂)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물(萬物)에 대(對)하여 지공무사(至公無私)하고 어느 하나라도 차별(差別)하거나 경시(輕視)하거나 하는 일이 없으니 역학(易學)에는 이것을 말하기를 만물(萬物)을 곡성(曲成)하여 남김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도 없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에게 마음이라는 신명(神明)이 있으되 누구 하나도 그 신명(神明)을 보거나 듣거나 한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들은 사람도 없으면서, 사람마다 자기(自己)에게 신명(神明)이 있는 것을 의심(疑心)치 아니하고 또 남에게 신명(神明)이 있는 것도 부인(否認)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사람마다 그 신명(神明)으로써 사물(事物)을 생각하고 그 생각하는 바를 좇아서 그 몸이 행동(行動)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자기(自己)의 신명(神明)이 어디서 나오고 또 어떻게 사물(事物)을 생각하는가를 알게되면 스스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고 또 어떻게 사물(萬物)을 창조(創造)하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元來)  신명(神明)은 형질(形質)이 없어서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맛도 냄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질(形質)이 없기 때문에 또한 무한(無限)한 것입니다.
 
모든 물체(物體)가 형질(形質)을 가지고 있는 자(者)는 그 맡은 바의 소임(所任)밖에는 다하지 못하여 눈은 보는 일 이외(以外)에는 하지 못하고 귀는 듣는 일 이외(以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유한(有限)이라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명(神明)은 무한(無限)하기 때문에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접응(接應)치 못함이 없고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생각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형질(形質)이 있는 유한(有限)한 자(者)는 나고 없어지고 하는 생멸(生滅)이 있어 항구(恒久)치 못하나 무한(無限)한 신명(神明)은 생멸(生滅)이 없고 일기장존(一氣長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형질(形質)이 없으시기 때문에 또한 무한(無限)하여 우주(宇宙)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접응(接應)치 못하심이 없고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能)치 못하심이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이시며 또 이 우주(宇宙)와 함께 영원불궁(永遠不窮)하신 것입니다. 역학(易學)에는 이 뜻을 말하여 신(神)은 방(方)이 없고 역(易)은 체(體)가 없다하고 또 천지(天地)의 도(道)는 항구(恒久)하여 그치지 아니한다 한 것입니다. 또 역학(易學)에는 물(物)의 생생(生生)함에는 기(氣), 정(精), 형(形)의 순(順)이 있고 무형(無形)한 기(氣)가 맏이로 나타난다하니 이 이(理)에 의(依)하여 만물(萬物)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무형(無形)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온갖 사상(思想)과 계획(計劃)같은 것도 무형(無形)한 신명(神明)에서 나오고 우주간(宇宙間)의 억조물물(億兆物物)도 모두 무형(無形)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 만사만물(萬事萬物)을 지각(知覺)하고 기억(記憶)하고 사고(思考)하고하는가 하는 것은 꼭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물(物)에 비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위에 생생(生生)하고있는 만물(萬物)의 생명(生命)은 모두 태양(太陽)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오 그 생명(生命)이 여러 가지 형태(形態)로 엉켜서 만물(萬物)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간(宇宙間)에는 본시(本是) 태양(太陽)의 소자출(所自出)한 원천화(原天火)가 있고 그 원천화(原天火)의 어느 일점(一點)에 결정(結精)된 불덩어리가 곧 태양(太陽)이니 원천화(原天火)와 태양(太陽)과의 차이(差異)는 그 본질(本質)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는 감추어있고 하나는 나타나있는 차(差)밖에는 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원천화(原天火)는 체(體)가 되고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은 용(用)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속에는 만물(萬物)의 씨가 포함(包含)되어있고 그것이 이 땅위에 내려와서 만물(萬物)로 번식(繁殖)된 것입니다. 사람의 씨도 太陽의 광명(光明)에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신명(神明)도 태양(太陽)과 같이 광명(光明)하여 능(能)히 만사만물(萬事萬物)에 비춰서 그 자태(姿態)를 밝게 나타내는 것이니 이 밝게 비취는 작용(作用)이 곧 지각(知覺)이 되는 것입니다.
 
또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은 허령(虛靈)한 까닭에 능(能)히 만물(萬物)의 씨를 포함(包含)하고 있는 것이오 사람의 신명(神明)도 그러한 광명(光明)을 이어받아서 출생(出生)한 것임으로 역시(亦是) 허령(虛靈)하여 능(能)히 만사만물(萬事萬物)을 포함(包含)하는 것이니 이 포함(包含)하는 작용(作用)이 곧 기억(記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밝음이 커질수록 그 지각(知覺)이 밝아지고 그 포함(包含)함이 넓을수록 그 기억(記憶)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역학(易學)에는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밖으로부터 안에 들어와서 생명(生命)이 되는 것을 천하(天下)에 뇌(雷)가 행(行)하여 물(物)이 감응(感應)한다하고 그 광명(光明)이 안에 쌓이고 위에 빛나는 것을 대축(大畜)이라 하는데 이것은 광휘(光輝)가 빛나서 마음의 체(體)가 날로 새로워지고 기억(記憶)이 넓어서 많이 전언왕행(前言往行)을 안다는 것입니다.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사람에게 내려와서 어떻게 밝은 신명(神明)을 내는가하면 그것은 고지무지(鼓之舞之)하는 뇌동작용(雷動作用)에 의(依)하는 것입니다.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하늘 위에 있을 때에는 강대(强大)한 힘의 양성(陽性)을 띄고 있으나 그것이 이 땅위에 내려오는 때는 도중(途中)에서 음성(陰性)으로 변(變)하고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 화(化)하여 고동(鼓動)하는 운동(運動)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는 역학(易學)에 태양화(太陽火)가 하향(下向)하여 땅에 접(接)하는때에 진뢰(震雷)로 변(變)한다는 이(理)에 의(依)한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과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呼吸)은 모두 이 태양광명(太陽光明)의 뇌동작용(雷動作用)에 의(依)한 것이오 사람의 신명(神明)이 만물(萬物)을 비취는 것도 또한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부터 발생(發生)하는 광명(光明)의 힘입니다.
 
역학(易學)에 고지무지(鼓之舞之)하여써 신(神)을 다한다함은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써 신명(神明)을 밝히는 뜻을 말한 것이며 전(前)에 말한 대축(大畜)의 이(理)로써 보면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이 심장(心臟)에 깃들여서는 뇌동작용(雷動作用)으로써 고동(鼓動)하여 열(熱)과 빛을 생(生)하고 그 염상(炎上)한 빛은 뇌(腦)에 올라가서 밝음을 발휘(發揮)하는 것입니다. 심장(心臟)은 고동(鼓動)하여 사물(事物)을 결행(決行)하는 작용(作用)을 행(行)함으로 심장(心臟)이 강(强)한 사람은 사물(事物)을 결행(決行)하는 힘이 강(强)한 것이오 뇌(腦)는 지정(止靜)하여 물(物)을 비취는 작용(作用)을 행(行)함으로 뇌(腦)가 밝은 사람은 사물(事物)을 감찰(鑑察)하는 명(明)이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로써보면 낮과 밤의 오고가고 함과 사시(四時)의 열리고 닫히고 함과 조수(潮水)의 밀고 썰고 함과 같은 것이 모두 우주(宇宙)의 노동작용(雷動運動)인 동시(同時)에 우주고동(宇宙鼓動)의 원동력(原動力)이 되는 태양(太陽)의 온 광명(光明)이 곧 하나님의 신명(神明)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명(神明)과 사람의 신명(神明)은 그 본질(本質)은 하나이면서 다만 통체(統體)와 분신(分身)의 차이(差異)가 있을 뿐이니 이 까닭에 역학(易學)에서는 상제(上帝)도 진(震)에서 나오고 만물(萬物)도 진(震)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의 생명(生命)이 태양(太陽)으로부터 나온 까닭에 사람은 잠시(暫時)도 태양(太陽)을 떠나지 못하고 땅과 함께 쉴 사이가 없이 태양(太陽)의 주위(周圍)를 돌고있는 것입니다.
 
 
二. 사람의 尊嚴性
이 땅위에는 동물식물( 動物植物)같은 생물(生物)이 수(數)없이 살고 있으나 그 중(中)에서 오직 사람은 그러한 생물(生物)들과는 크게 구별(區別)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육체(肉體)의 면(面)으로만 보면 동물(動物)과 큰 차(差)가 없는 듯하나 그 생활(生活)하는 면(面)으로 보건대 동물(動物)들은 천연물(天然物)에 아무런 가공(加工)을하지 아니하고 천연(天然)그대로를 먹고사는 것입니다. 이는 그러한 동물(動物)들은 그 몸의 조직(組織)이 천연물(天然物)그대로를 먹고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화식(火食)을하기 위(爲)하여는 불을 만들어야하고 음식(飮食)을 끓이기 위(爲)하여는 솥을 만들어야하고 솥을 만들기 위(爲)하여는 광물(鑛物)을 파내야 하고 이거(里居)하기 위(爲)하여는 우물을 파야하고 고기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기 위(爲)하여는 그물을 만들어야하고 농사(農事)를 짓기 위(爲)하여는 쟁기를 만들어야하고 큰물을 건너기 위(爲)하여는 배를 만들어야하고 곡식(穀食)을 찧기 위(爲)하여는 절구를 만들어야하는등(等) 사람의 생활(生活)에 필요(必要)한 기물(器物)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또 동물(動物)들은 간단(簡單)한 집단생활(集團生活)이 있는 이외(以外)에 사회조직(社會組織)이라는 것이 없으나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넓은 사회(社會)를 만들고 공동(共同)으로 생활(生活)하고 있기 때문에 물화(物貨)를 서로 바꾸기 위(爲)하여 시장(市場)을 설(設)하여야하고 도적(盜賊)을 막기 위(爲)하여 수비(守備)를차려야하고 혼례(婚禮)를 정(定)하여 가정(家庭)을 이루어야하고 문자(文字)를 만들어 서로 사상(思想)을 통(通)하여야하는등(等) 온갖 제도(制度)를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그 자신(自身)이 살기 위(爲)하여 천연물(天然物)에 인공(人工)을 가(加)하고 일용(日用)하는 기물(器物)을 만들고 사회생활(社會生活)에 필요(必要)한 온갖 제도(制度)를 만들고 있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이루지 못한 일을 사람이 대신(代身)하여 창조(創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역학(易學)에는 하늘, 땅, 사람을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라하는 것입니다. 재(才)라함은 물건(物件)을 창조(創造)하는 재능(才能)이 있다함을 말함이니, 하늘은 만물(萬物)의 씨를 내려보내고 땅은 그 씨를 받아서 기르고 사람은 천연물(天然物)에 인공(人工)을 가(加)하고 기물(器物), 제도(制度)를 만들고 있어 하늘 땅 사람이 모두 물건(物件)을 창조(創造)하는 재능(才能)이 있으므로 셋을 병칭(竝稱)하여 삼재(三才)라 한 것입니다. 이 땅위의 만물(萬物)은 어느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으나 오직 사람이 삼재(三才)의 자리를 이루고있다 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손자(孫子)라하니 여기에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사람을 특(特)히 손자(孫子)라하고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업(事業)은 이 손자(孫子)들을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천공(天工)은 반드시 기물(器物) 제도(制度)같은 것을 만드는 인공(人工)을 대(待)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도와서 대행(代行)하는 것입니다. 정치(政治)니 학설(學說)이니 산업(産業)이니하는 것은 그 외형(外形)으로는 비록 사람들의 하는 사업(事業)같으나 그 실(實)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사람은 인공(人工)으로써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고 또 대행(代行)하고 있으므로 의지(意志)의 자유(自由)를 가지지 아니하고는 그를 대행(代行)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는 인공(人工)의 시행(施行)되는 영역(領域)이 곧 자유의지(自由意志)의 활동(活動)하는 범위(範圍)로되는 까닭입니다. 동물(動物)같은 것은 비록 먹고사는등(等)의 자유(自由)가 있으나 그것은 다만 천연물(天然物)을 그대로 먹고사는 자유(自由)에 불과(不過)하고 물(物)의 생산가공(生産加工)에 기여(寄與)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은 천지(天地)와 함께 물(物)을 창조(創造)하기 위(爲)하여 이러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하늘로부터 이어받으니 이것을 천부(天賦)의 자유(自由)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으로부터 그 의지(意志)의 자유(自由)를 뺐는다고 하면 이는 물(物)을 창조(創造)하는 재능(才能)과 하나님의 생생사업(生生事業)을 돕는 대행권(代行權)을 아울러 뺐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의 속에는 이 재능(才能)과 대행권(代行權)을 마음대로 행사(行使)하는 의지(意志)의 자유(自由)가 그 중심(中心)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意志)의 자유(自由)가 없는 곳에는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이 보전(保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학(易學)에 천하(天下)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염려(念慮)하리오 천하(天下)가 한곳으로 돌아가되 그 가는 길은 다르고 한결같이 이르되 그 염려(念慮)하는바는 백(百)가지라 천하(天下)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염려(念慮)하리오한 것은 사람에게 행동(行動)의 자유(自由)와 사상(思想)의 자유(自由)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즉(卽) 사람마다 의지(意志)의 자유(自由)로써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는 대행권(代行權)을 행사(行使)하면 천하(天下)는 저절로 한 곳으로 돌아간다 함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사회(社會)에는 그 사회를 다스리는 통치권(統治權)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통치권(統治權)은 그 사회(社會)안에서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대행(代行)하고 있는 뭇 사람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대표(代表)하여 임시(臨時)로 행사(行使)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통치권(統治權)은 개인(個人)의 사유물(私有物)도 아니오 또 영원(永遠)히 계속(繼續)하는 영구권(永久權)도 아니오, 다만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대행(代行)하기 위(爲)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천명(天命)을받고 사람들로부터 위임(委任)을 받은 것이니 역(易學)에는 이것을 천의(天意)에 순(順)하고 인심(人心)에 응(應)함이라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통치권(統治權)을 함부로 휘둘러서 하늘 뜻을 어기고 사람의 존엄성(尊嚴性)을 짓밟으면 그는 반드시 혁명(革命)의 대상(對象)이되는 것이니 혁명(革命)이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명(天命)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三. 세 종교(宗敎)는 삼도일체(三道一體) 
우주(宇宙)의 모든 운동(運動)은 하나도 둥근 궤도(軌道)를 환운동(圜運動)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니 사시(四時)와 주야(晝夜)가 그러하고 식물(植物)의 열매로부터 싹이 트고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라든지 벌레가 유충(幼蟲), 번데기, 성충(成蟲)의 순(順)으로 변화(變化)하는 것이라든지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도 그 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땅은 그것을 받아서 기르고 길러낸 사람은 다시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가는 때에 비로소 하늘, 땅, 사람의 환운동(圜運動)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動物)에도 얼마만한 신명(神明)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신체(身體)는 발은 둘로 되어 땅을 밟고 머리는 하나로 되어 하늘을 향(向)하여 삼각형(三角形)으로써 하늘과 땅을 직결(直結)하고 있으므로 사람의 신명(神明)은 위로 올라가서 하늘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나 동물(動物)은 몸이 가로로 놓여 평면(平面)이되고 있으므로 그 신명(神明)은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신명(神明)은 동물(動物)보다 특이(特異)한 것이 있으니 말과 글을 사용(使用)하는 것입니다. 동물(動物)에도 간단(簡單)한 말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말로써 서로 복잡(複雜)한 의사(意思)를 통(通)하는 것은 이 땅위의 만물중(萬物中)에 오직 사람뿐이며 특(特)히 글은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을 초월(超越)하여 먼곳에 지음쳐(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서로 의사(意思)를 통(通)할 수가 있고 몇 천백년전(千百年前)의 일이라도 글로써 그때의 사정(事情)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말과 글이 있는 까닭에 만물중(萬物中)에서 독특(獨特)한 사부(師傅)의 도(道)가 생기고 고왕금래(古往今來)로 수(數)없는 사람의 경험(經驗) 사고(思考)한 성과(成果)를 사제(師弟)의 전수(傳授)에 의(依)하여 더욱 그 신명(神明)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에 사람이 나지 아니하면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나 알을 낳지 못하는 벌레가 환운동(圜運動)을 하지 못함과 같아서 천지(天地)도 환운동(圜運動)을 행(行)치 못하여 생생작용(生生作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삼재(三才)의 환운동(圜運動)은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의 세 층(層)의 길로 도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의 씨가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와서 사람을 창시(創始)하니 이것을 천도(天道)라하고, 땅은 그 씨를 받아서 사람을 낳고 기르니 이것을 지도(地道)라하고 사람은 그 마음을 닦고 밝은 정신(精神)을 스스로 더욱 밝게하여 하나님의 신명(神明)과 서로 통(通)하니 이것을 인도(人道)라하는 것입니다. 인류(人類)의 역사(歷史)가 있은 연후(然後)에 세 큰 성인(聖人)이 나와서 차례로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를 설교(說敎)하시니 그 성인(聖人)은 곧 서가여래(釋迦如來) 공부자(孔夫子) 주(主) 예수이십니다.
 
서가여래(釋迦如來)는 처음으로 나와서 불교(佛敎)를 가르치시니 불교(佛敎)는 천도(天道)를 말한 것임으로 그 교리(敎理)는 창창공공(蒼蒼空空)한 이 대우주(大宇宙)를 상(象)하여 색(色)이 곧 공(空)이오 공(空)이 곧 색(色)이라하고 오로지 창공(蒼空)과 같이 활연대각(豁然大覺)함을 주(主)하고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일을 말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이는 공부자(孔夫子)이시오 공부자(孔夫子)는 유교(儒敎)입니다. 유교(儒敎)는 지도(地道)를 말한 것임으로 그 교리(敎理)는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생활법칙(生活法則)을 주(主)로하여 부모(父母)에게 효(孝)하고 나라에 충(忠)하고 부부(夫婦)가 열(烈)하여야 한다는 대삼륜(大三倫)을 밝힌 것이니, 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대삼륜(大三倫)의 길을 밟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主)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 나와서 기독교(基督敎)를 설(設)하신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인도(人道)를 말한 것임으로 사람이 천당(天堂)으로 간다는 것이오 천당(天堂)은 하나님의 계신 곳이니 이는 사람이 하늘로 돌아가는 환운동(圜運動)의 길을 말한 것입니다. 세계인류(世界人類)가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손자(孫子)가 아닌 이가 없고 세 큰 성인(聖人)이 또한 똑 같은 하나님의 손자(孫子)이시로되 오직 주(主) 예수를 독생자(獨生子)라하는 것은 기독교(基督敎)가 나와서 처음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앞으로 돌아가는 인도(人道)를 가르친 까닭에 부자(父子)의 도(道)에 비겨서 홀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이시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역학(易學)의 정역(正易)에 이르시기를 도(道)가 셋으로 나뉨은 이(理)의 자연(自然)함이니 이는 유(儒)이오 불(佛)이오 선(仙)이라함은 이 세 종교(宗敎)를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종교(宗敎)는 각기(各其)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를 가르친 것이로되 그 근본교리(根本敎理)로서 불교(佛敎)의 자비(慈悲)와 유교(儒敎)의 인(仁)과 기독교(基督敎)의 박애(博愛)는 모두 똑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우주생생(宇宙生生)의 대도덕(大道德)이며 불교(佛敎)의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유교(儒敎)의 상제(上帝)와 기독교(基督敎)의 하나님 아버지도 모두 우주(宇宙)의 주재자(主宰者)이신 동시(同時)에 만물(萬物)의 시조(始祖)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세 종교(宗敎)의 부르는 말이 서로 같지 아니한 까닭은 불교(佛敎)의 천도(天道)는 주(主)로 마음의 각(覺)함을 말한 것임으로 도(道)를 각(覺)하는 신명(神明)의 도道에 비겨서 무량불(無量佛)이라하고 유교(儒敎)의 지도(地道)는 주(主)로 인간사회(人間社會)의 정치(政治)를 말한 것임으로 군신(君臣) 상하(上下)의 도(道)에 비겨서 상제(上帝)라하고 기독교(基督敎)의 인도(人道)는 주(主)로 아들이 아버지의 앞으로 돌아가는 길을 말한 것임으로 부자(父子)의 도(道)에 비겨서 하나님 아버지라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들 사람과의 관계(關係)에 대(對)하여, 이를 혈연(血緣)의 줄로써 보면 하나님은 시조(始祖)이시오 우리들은 손자(孫子)이며 이를 상하(上下)의 분(分)으로써 보면 하나님은 상제(上帝)이시오 우리들은 백성(百姓)이며 이를 교양(敎養)의 공(工)으로써 보면 하나님은 스승이시오 우리들은 제자(弟子)이니 세 종교(宗敎)에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또한 사제의 도(師弟의 道) 군신의도(君臣의 道) 부자의 도(父子의道) 와도 서로 통(通)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종교(宗敎)는 외형(外形)으로는 서로 다른 듯하나 그 실(實)은 한 뿌리로부터 세 줄기가 나온 것입니다.
 
역학(易學)에서는 하나님을 천조상제(天祖上帝)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혈연(血緣)의 줄과 상하(上下)의분(分)을 아울러 말한 것입니다. 세간(世間)에서는 종교(宗敎)를 내세(來世)의 일이라 하여 사후(死後)에 천당극락(天堂極樂)으로 가기 위(爲)하여 믿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역학(易學)에서는 사람의 신명(神明)이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 땅위의 현실사회(現實社會)에 천당극락(天堂極樂)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역학(易學)에 도(道)를 나타내고 덕행(德行)을 신(神)하게하여 신(神)과 수작(酬酌)할 수 있고 신(神)을 도울 수 있다함이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종교(宗敎)는 천지인(天地人)의 삼도일체(三道一體)로서 사람은 어느종교(宗敎)를 믿든지 모두 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즉(卽) 사람은 하늘 속에 살고 있음으로써 천도(天道)인 불교(佛敎)를 믿는 것이오 땅위에 살고 있음으로써 지도(地道)인 유교(儒敎)를 믿는 것이오 사람으로 태어나고 있으므로 인도(人道)인 기독교(基督敎)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 사람은 종교(宗敎)를 믿고 믿지 아니함을 막론(莫論)하고 또 어느 종교(宗敎)를 믿음을 막론(莫論)하고 그 실(實)에 있어서는 모두 불교(佛敎) 유교(儒敎) 기독교(基督敎)를 아울러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사람이 하나님의 계신 줄을 알고 또 하나님과의 사이에 조손(祖孫)의 윤(倫)을 차리는 것을 정륜(正倫)이라 합니다. 사람은 정륜(正倫)을 안 뒤에야 삼재(三才)의 환운동(圜運動)하는 인도(人道)를 알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륜(正倫)의 길을 가르쳐주신 성인(聖人)의 공덕(功德)은 참으로 넓고 큰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없는 세상(世上)은 캄캄한 암흑(暗黑)으로서 그런 세상(世上)에서는 해와 달의 광명(光明)도 한 허영(虛影)에 불과(不過)하며 성인(聖人)의 교화(敎化)를 받지 못한 지대(地帶)는 지금도 미개인(未開人)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四. 사회(社會)의 생장성(生長成)
세 종교(宗敎)의 교리(敎理)는 또한 생명체(生命體)의 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생장성(生長成)의 원리(原理)와 통(通)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萬物)의 생장(生長)하는 자(者)는 무제한(無制限)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오 그 생장(生長)이 어느 한도(限度)에 이르면 반드시 생장(生長)을 멈추고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 변(變)하여 여물게 되는 것이니 역학(易學)에 대과(大過)는 전(顚)한다함이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나 동식물(動植物)의 각(各) 개체(個體)에 생장성(生長成)의 일생(一生)이 있음과 같이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도 또한 생장성(生長成)이 있으니 불교(佛敎)는 사람이 처음으로 나올 때의 생(生)을 상(象)한 것임으로 살생(殺生)을 경계(警戒)하여 교도(敎徒)들이 소식(素食)을 하는 것이오 유교(儒敎)는 사람이 점점 자라서 생존경쟁(生存競爭)을 하는 때의 장(長)을 상(象)한 것임으로 형벌(刑罰), 무비(武備), 혁명(革命) 등(等)의 일을 흔히 말한 것이오 기독교(基督敎)는 사람의 신명(神明)이 밝아서 하늘로 올라가는 때의 성(成)을 상(象)한 것임으로 주(主)로 영혼(靈魂)에 대(對)한 일을 말한 것입니다.
 
생장(生長)이라함은 만물(萬物)의 운동(運動)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발산(發散)하는 오향운동(外向運動)을 행(行)하는 것이니 초목(草木)의 열매가 터져서 싹이 나오고 줄기에 진액(津液)이 올라가서 꽃과 잎이 피는 것등(等)이 모두 생장(生長)하는 현상(現象)이오 성(成이라함은 생장(生長)하던 물(物)이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써 내향운동(內向運動)을 행(行)하는 것이니 초목(草木)의 열매가 익고 줄기 위에 올라간 진액(津液)이 도로 아래로 내려오는 것등(等)이 모두 성(成)하는 현상(現象)입니다.
 
우리 인류(人類)의 역사(歷史)로써 보면 종래(從來)의 여러 천년(千年)동안은 자체(自體)의 삶을 위(爲)하여 격열(激烈)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 일어나고 세력(勢力)을 가진자(者)가 주위(周圍)에 있는 백성(百姓)들을 정복(征服)하여 스스로 임금노릇을 하고 강대(强大)한 나라들이 약소(弱小)한 나라를 빼앗아서 식민지(植民地)를 만들고 하는등(等)의 생장시운(生長時運)입니다. 물(物)의 생장(生長)은 반드시 상극(相克)을 통(通)하여 행(行)하는 것이오 생장(生長)이 없으면 열매를 맺는 성(成)이 있을 수 없는 것임으로 생장기(生長期)에 생종경쟁(生存競爭)이 있는 것은 불가피(不可避)한 일입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각(各)나라의 민중(民衆)들이 외부(外部)로부터 중심(中心)을 향(向)하여 국가(國家)의 원수(元首)를 선출(選出)하고 전세계(全世界)가 국제연합(國際聯合)을 만들어 장차(將次) 세계단일국가(世界單一國家)를 세울 기세(氣勢)를 보이고 인구(人口)의 과잉(過剩)을 걱정하여 산아(産兒)를 제한(制限)하고 있음과 같은 것은 모두 생장(生長)을 멈추고 성(成)으로 옮겨가는 현상(現象)이라 할 것입니다.
 
또 이 지구(地球)도 종래(從來)에는 내부(內部)의 열(熱)이 외부(外部)로 발산(發散)하여 땅위에 한열(寒熱)의 차(差)가 심(甚)하고 남북극(南北極)의 바다에는 큰 얼음지대(地帶)가 생기고하는등(等)의 생장현상(生長現象)을 나타내더니 지금에 와서는 지구(地球)의 열(熱)이 속으로 들어가서 지온(地溫)이 높아지고 남북극(南北極)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始作)하고 하는등(等)은 또한 지구(地球)의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써 성(成)으로 들어가는 현상(現象)이라할 것입니다. 지구(地球)의 운동(運動)이 종래(從來)의 발산작용(發散作用)으로부터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 변(變)하고 남북극(南北極)의 얼음이 풀리게되면 스스로 조수(潮水)의 왕래(往來)에 변화(變化)를 일으키게되고 조수(潮水)의 변화(變化)가 일어나면 지구(地球)와 달의 운행궤도(運行軌道)에도 또한 변화(變化)가 일어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학(易學)에서는 종래(從來)의 생장(生長)하는 시운(時運)을 선천(先天)이라하고 앞으로 도래(到來)할 성(成)의 시운(時運)을 후천(后天)이라하며 조수(潮水)와 달의 변화(變化)가 일어나는 때를 后天의 첫끝이라 하며 역학(易學)의 복희도(伏羲圖), 문왕도(文王圖), 정역도(正易圖)도 또한 생장성(生長成)의 상(象)을 취(取)한 것입니다.
 
선천(先天)과 후천(后天)의 일이례(一二 例)를 들건대 벌레의 유충(幼蟲)이 생장(生長)하는 동안에는 지면(地面)을 기어다니고 풀이나 나무의 잎을 먹으니 이는 벌레의 선천(先天)입니다. 이것이 점점 자라서 더 자랄 수 없는 한도(限度)에 달(達)하면 몸이 변(變)하여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다시 변(變)하여 성충(成蟲)인 나비가 되는 것이니 이는 벌레의 후천(后天)입니다. 나비는 날개로써 공중(空中)을 날아다니고 그 식물(食物)도 꽃 속의 꿀 같은 것을 먹으니 유충(幼蟲)과 성충(成蟲)이 비록 동일(同一)한 벌레이로되 선천(先天)의 유충(幼蟲)과 후천(后天)의 나비는 그 차원(次元)이 전연(全然)다른 것이며 역학(易學)의 고(蠱)는 이 상(象)을 말한 것입니다. 또 태아(胎兒)가 뱃속에 있는 동안은 전(全)혀 모체(母體)에 의존(依存)하여 머리가 땅쪽을 향(向)하고 귀, 눈, 입, 코가 모두 닫히니 이는 사람의 선천(先天)입니다 태아(胎兒)가 점점 자라서 그 이상(以上) 더 모체중(母體中)에 있을 수 없으면 스스로 궁문(宮門)이 열리며 이 세상(世上)에 나오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후천(后天)입니다. 세상(世上)에 나오면서 귀, 눈, 입, 코가 열리어 딴 천지(天地)를 보게되고 머리의 방향(方向)이 뒤집혀서 하늘을 향(向)하게 되니 궁중(宮中)과 궁외(宮外)는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는 별(別)다른 세계(世界)이며 역학(易學)에 태궁(胎宮)의 이목총명(耳目聰明)이라 함은 이 상(象)을 말한 것입니다. 선후천(先后天)의 변화(變化)는 차원(次元)을 달리한 별유천지(別有天地)입니다
 
五. 충 효 열의 삼대륜 (忠 孝 烈의 大三倫)
사람이 지도(地道)로부터 인도(人道)로 넘어가서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정륜(正倫)의 길이 있으니 정륜(正倫)의 길은 곧 윤리도덕(倫理道德)의 대종(大宗)인 충효열(忠孝烈)의 대삼륜(大三倫)의 길입니다. 세간(世間)에서는 대삼륜(大三倫)을 귀족사회(貴族社會)의 봉건도덕(封建道德)이라하여 비방(誹謗)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대삼륜(大三倫)은 성인(聖人)이 사회(社會)를 교화(敎化)하기 위(爲)하여 베풀어 놓은 우주생생(宇宙生生)의 대도덕(大道德)이오 귀족계급(貴族階級)을 옹호(擁護)하기 위(爲)함이 아닙니다. 다만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자기(自己)네의 권익(權益)을 위(爲)하여 그것을 악용(惡用)한것 뿐입니다.
 
충(忠)이라함은 나라를 잘되게 하는 일이니 나라가 잘되면 그 속에 있는 개인(個人)도 모두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忠)을 다하는 것은 나라를 위(爲)하는 일인 동시(同時)에 또한 자신(自身)을 위(爲)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와 자신(自身)을 아울러 위(爲)하는 일에 시대(時代)의 구별(區別)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烈)이라함은 부부(夫婦)가 일부일부(一夫一婦)의 도(道)를 굳게 지켜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는 일이니 이 세상(世上)에 어느 남편(男便)이 그 부인(婦人)의 열(烈)함을 원(願)치 아니하는 이가 있으며, 또 어느 부인(婦人)이 그 남편(男便)의 열(烈)함을 원(願)치 아니하는 이가 있으리오 남녀(男女)가 서로 열(烈)을 지킴은 그 상배자(相配者)를 위(爲)하는 일인 동시(同時)에 또한 자신(自身)을 위(爲)하는 일이 되는 것이오 나아가서는 올바른 가정(家庭)에 올바른 자녀(子女)를 기르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효(孝)라함은 자신(自身)의 출생(出生)한 바의 생명(生命)의 뿌리를 건건(健健)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손자(孫子)이오 하나님과 손자(孫子)들과의 사이에는 비록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길고 긴 생명(生命)의 줄이 잇닿아 있으니 이것이 사람의 출생(出生)한 뿌리이며 마치 지구(地球)와 태양(太陽)과의 사이에 큰 인력(引力)이 연결(連結)되어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삼재(三才)의 환운동(圜運動)에는 이 줄로써 원심운동(遠心運動)과 향심운동(向心運動)을 행(行)하고 또 사람의 세데(世代)는 한대(代) 한대(代)씩 늘어나가는데 그 세대(世代)의 늘어나감을 따라서 중심(中心)으로부터의 거리(距離)가 차차(次次)로 변(變)하여 반드시 나선형(螺旋形)으로써 새 궤도(軌道)를 돌게되는 것이니 이 까닭에 사람의 얼굴은 억만인(億萬人)의 억만형(億萬形)으로서 하나도 똑같은 모양(模樣)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손자(孫子)들과의 사이에는 나선형(螺旋形)으로 돌고있는 줄이 있고 그 줄의 중간(中間)에는 역대(歷代) 조상부모(祖上父母)의 여러 마디를 이루고 있어 이것이 그 자손(子孫)들의 촌수(寸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父母)에게 효(孝)를 올려바치면 그것이 이 줄을 통(通)하여 위로 역대조상(歷代祖上)의 마디를 거쳐서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생명(宇宙生命)의 본원(本元)이므로 효(孝)가 위에 올라가는 때에는 환운동(圜運動)의 원리(原理)에 의(依)하여 생명(生命)의 원기(元氣)가 다시 그 자손(子孫)에게로 내려오는 것이니 이것이 곧 생명(生命)의 뿌리가 건건(健健)하게 되는 것이며 역학(易學)에는 이것을 천혜(天惠)가 위로부터 아래에 내리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父母)에게 효(孝)함은 곧 하나님에게 효(孝)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이 자신(自身)에게 생명(生命)의 원기(元氣)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이 까닭에 효(孝)는 부모(父母)를 위(爲)하는 일인 동시(同時)에 또한 자신(自身)을 위(爲)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父母)에게 불효(不孝)하면 자신(自身)과 부모(父母)와의 마음이 반대(反對)되는 양(兩)쪽으로 갈려서 두 사이에 잇닿은 생명(生命)의 줄이 통(通)치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오는 생명(生命)의 원기(元氣)도 또한 자신(自身)에 통(通)치 못하여 한 개(個)의 뿌리 없는 고아(孤兒)가 되는 것입니다.
 
자래(自來)로 불효(不孝)한 집에 생식(生殖)이 창성(昌盛)치 못한 것은 스스로 그 생명(生命)의 줄을 불통(不通)시키는 까닭입니다. 생명(生命)의 줄의 원리(原理)는 태양(太陽)에서 볼 수가 있으니 사람의 생명(生命)의 씨가 태양(太陽)으로부터 나온 까닭에 사람은 잠시(暫時)도 태양(太陽)의 줄을 떠나지 못하고 지구(地球)에 붙어서 쉴 사이 없이 태양(太陽)의 주위(周圍)를 돌고 있으니 그 태양(太陽)을 중심(中心)으로하여 그 주위(周圍)를 돌고 있음은 효(孝)를 올리는 상(象)이 되고 태양(太陽)으로부터 부단(不斷)히 광명(光明)을 받고 있음은 생명(生命)의 원기(元氣)가 돌아오는 상(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효열(忠孝烈)이 어찌하여 윤리도덕(倫理道德)의 대종(大宗)인 삼대륜(大三倫)이 되는가하면 역학(易學)에는 물(物)의 생생(生生)하는 순서(順序)를 말하기를 만물(萬物)이 있은 연후(然后)에 남녀(男女)가 있고 남녀(男女)가 있은 연후(然后)에 부부(夫婦)가 있고 부부(夫婦)가 있은 연후(然后)에 부자(父子)가 있고 부자(父子)가 있은 연후(然后)에 군신(君臣)이 있다하니 이것을 땅위의 생물(生物)의 순서(順序)에 비겨보면 수토(水土)가 있은 뒤에 식물(植物)이 있고 식물(植物)이 있은 뒤에 동물(動物)이 있다함과 같아서 부부(夫婦)는 수토(水土)의 상(象)이되고 부자(父子)는 식물(植物)의 상(象)이되고 나라는 동물(動物)의 상(象)이되는 것입니다.
 
부부(夫婦)의 가정(家庭)은 수토(水土)가 만물(萬物)을 낳고 기르고 함과 같이 아들딸을 낳아서 이 사회(社會)를 이루는 기본조직(基本組織)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감응(感應)하여 기(氣)를 통(通)하여야 생물(生物)이 번성(蕃盛)함과 같이 가정(家庭)은 부부(夫婦)가 화합(和合)하여 감응생활(感應生活)을 하여야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는 것이니 이 감응생활(感應生活)은 반드시 열(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조상(祖上)으로부터 대대(代代)로 이어 내려오는 부조자손(父祖子孫)의 혈연(血緣)은 나무가 점점(漸漸) 자라서 매년(每年) 새 가지를 생(生)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에 년차출생(年次出生)의 순서(順序)가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의 혈연(血緣)에 세대(世代)가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는 그 소자출(所自出)한 뿌리에 햇빛이 비치는 것을 가리워 그의 마르는 것을 싸주고 있으니 이것은 그 가지가 자체(自體)의 생(生)을 위(爲)하여 그 부모(父母)되는 뿌리를 보호(保護)하는 효(孝)입니다.
 
사람의 사회생활(社會生活)은 동물체(動物體)의 각기관(各器官)이 서로 돕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체내(動物體內)의 각기관(各器官)이 모두 그 맡은 바의 본직(本職)을 지키고 서로 도와서 그 몸을 보전(保全)하는 것은 그 몸에 대(對)한 충(忠)이 되는 것이며 그 몸에 충(忠)하는 것은 또한 스스로 각기관(各器官) 자신(自身)의 생(生)을 위(爲)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烈)의 원리(原理)는 수토(水土)의 감응(感應)에서 나오고 효(孝)의 원리(原理)는 식물(植物)이 그 뿌리를 보호(保護)하는데서 나오고 충(忠)의 원리(原理)는 동물체(動物體)의 각기관(各器官)이 그 통체(統體)를 돕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효열(忠孝烈)은 만물(萬物)의 생생원리(生生原理)가 되고 인간(人間)의 모든 윤리도덕(倫理道德)도 충효열(忠孝烈)로부터 뻗어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손자(孫子)와의 잇는 생명(生命)의 줄은 손자(孫子)들의 효(孝)가 하나님에게로 통(通)하는 길이므로 우리들의 신명(神明)이 위로 통(通)하는 것은 그 형태(形態)의 어떠한 것임을 물론(勿論)하고 모두 효(孝)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충(忠)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對)한 효(孝)가되고 부부(夫婦)가 열(烈)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에 대(對)한 효(孝)가 되고 사람들이 각기(各其) 본직(本職)을 지키는 것도 또한 효(孝)가 되는 것입니다.
 
그 중(中)에서 특(特)히 주요(主要)한 것은 은혜(恩惠)를 잊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출생(出生)한 뿌리가 되는 부모(父母)의 은덕(恩德), 우리를 가르쳐주신 성인(聖人)의 공덕(功德)을 비롯하여 공동(共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은혜(恩惠) 우리의 생활자료(生活資料)가 되는 물물(物物)의 은혜(恩惠)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은혜(功德恩惠)는 지극(至極)히 넓고 큰 것이니 이것을 총칭(總稱)하여 천은망극(天恩罔極)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호일흡(一呼一吸)과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모두 천은(天恩)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은혜(恩惠)를 감사(感謝)하고 잊지 아니하는 것은 효(孝)의 제일보(第一步)입니다.
 
이에 반(反)하여 그 본직(本職)을 지키지 못하거나 배은망덕(背恩忘德)하거나 하는자(者)는 비록 그것이 직접(直接)으로 부모(父母)를 박대(薄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結局) 모두 불효(不孝)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對)한 불효(不孝)는 또한 자기(自己)의 조상부모(祖上父母)에 대(對)한 불효(不孝)가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윤리도덕(倫理道德)을 사회(社會) 혈연(血緣) 가정(家庭)의 세 줄로 나눠놓으면 충효열(忠孝烈)이되고 하나님에게로 귀일(歸一)시키면 효(孝)가 되는 것입니다.
 
세 종교(宗敎)의 자비(慈悲), 인(仁), 박애(博愛)는 대체(大體) 누구에게 자비(慈悲)하고 누구에게 인(仁)하고 누구를 박애(博愛)하라는 것인가 하면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계인류(世界人類)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인류(世界人類)는 서로 따로 떨어져있는 사람이 아니오 모두 동일(同一)한 하나님의 손자(孫子)이오 우리들의 밭은(가까운) 촌수(寸數), 는(먼)촌수(寸數)의 형제(兄弟)입니다. 이 땅위의 전인류(全人類)는 비록 살빛이 서로 다르고 언어(言語)가 같지 아니하다 하더라도 모두 한 형제(兄弟)를 이루고 있어 소위(所謂) 동민족(同民族)과 이민족(異民族)의 차이(差異)라는 것은 다만 그 촌수(寸數)의 늘고 밭음과 사돈(査頓)을 맺고 맺지 아니한 차(差)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家庭)에서도 형제(兄弟)가 우애(友愛)하는 것이 부모(父母)에 대(對)한 첫째의 효(孝)가됨과 같이 세계인류(世界人類)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에게 대(對)하여 지극(至極)한 효(孝)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세계인류(世界人類)를 모두 화평(和平)스럽게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업인 까닭입니다.
 
 
六. 사람의 삶
우주(宇宙)의 생생(生生)에는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의 세 도(道)가 있고 또 생장성(生長成)의 세 단계(段階)가 있으므로 사람의 삶에도 또한 이러한 세 가지 형태(形態)가 있는 것입니다.
 
 
一. 사람은 하늘이 이루지 못한 천공(天工)을 대성(代成)하기 위(爲)하여 이 세상(世上)에 난 것입니다.
 
一. 사람은 이땅위의 모든 손자(孫子)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돕기 위(爲)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一. 사람은 그 신명(神明)이 하늘 땅으로 더불어 환운동(圜運動)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